경제위기 넘지 못한 개혁의 끝, 소련의 붕괴

워싱턴-노정민 nohj@rfa.org
2018.10.30
soviet_union_factory-620.jpg 1967년 소련 모스크바의 옷감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Photo courtesy of Wikipedia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경제위기 넘지 못한 개혁의 끝, 소련의 붕괴>

- 경제문제를 간과했던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개혁

- 경제개혁의 역효과로 경제위기 악화

- 경제에 대한 불만, 언론에서 자유롭게 표출

- 경제위기 불거지며 가맹공화국의 독립운동 시작

 

지난 두 차례에 걸쳐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개혁에 대해 살펴봤는데요, 개혁을 통해 새로운 소련 사회를 건설하려 했지만 결국 소련은 붕괴했습니다. 개혁 과정에서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정치개혁 외에 무엇이 더 필요했던 것일까요? 계속해서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개혁 내용과 실패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지난 시간,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개혁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고르바초프는 원래 사회주의를 없앨 생각이 아예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1985년에 대부분 소련 주민이 개량된 사회주의를 지지했다고 하셨는데요. 그런데 소련은 불과 6년 후인 1991년 겨울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왜 그런가요?

[란코프 교수]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개혁을 시작했을 때 경제문제를 많이 간과했고, 개혁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설계도가 없이 집을 고치고 있는 목수와 같았습니다. 그가 시작한 경제개혁은 역효과를 초래했습니다. 원래 목적이었던 경제발전의 가속화 대신, 경제위기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같은 무렵에 개혁을 시작한 중국은 고속성장을 시작했는데, 소련에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란코프 교수] 우선 개혁이 매우 혼란스럽게 이뤄졌습니다. 독립채산제가 시행되자 기업소에서 노동자의 월급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듣기에는 좋은 일이지만, 이 월급에서 나오는 돈이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결국 물건 부족 현상이 매우 심해졌고, 인플레이션도 악화했습니다.

반면 중국은 공업개혁보다 농업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1980년대의 중국은 너무 낙후된 나라여서 중국 사람의 4분의 3 이상이 시골에서 살았고, 그들이 바라는 것은 밥을 배불리 먹는 것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개인 농사 체제가 시작되자 열심히 일했고, 튼튼한 경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에서 농업은 주된 관심 대상이 아니었고, 소련경제와 총인구에서 농업과 농민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낮았습니다. 지금까지 1985년에 개혁을 시작한 소련경제가 이처럼 빨리 흔들리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많지만, 제가 볼 때 경제 정책의 실수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였습니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정치 민주화를 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이것은 착각이었습니다.

- 그런데 교수님, 소련 국민은 애초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개혁을 지지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들은 왜 생각을 바꾸었나요?

[란코프 교수] 제일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민들의 마음이 날씨처럼 바뀐다는 것입니다. 지금 인기가 있는 정치 인물도 몇 년 만에 모두 싫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고르바초프 총비서도 그랬습니다. 1985년의 소련은 잘 사는 나라가 아니었지만, 고르바초프 총비서가 취임한 이후 경제가 매우 빠르게 나빠졌습니다.

1940년대 말부터 소련에서는 배급제와 공급제가 거의 없었습니다. 기본 식량인 빵, 설탕, 국수나 감자와 같은 것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당연히 인민들은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민주화와 언론자유를 믿던 고르바초프와 그 지지자들은, 언론에 대한 감시와 검열을 거의 폐지했는데, 1980년대의 경제 위기에 대한 불만이 언론과 방송에서 자유롭게 표출됐습니다. 1989년 말부터 소련 인민들은 자유가 아주 많아졌을 뿐 아니라 사상에 대한 의심도 커졌습니다.

- 하지만 교수님, 원래 소련 국민은 사회주의를 지지했다고 말씀하신 걸로 기억하는데요.

[란코프 교수] 원래 그랬습니다. 하지만 1986-87년 이후 글라스노스트, 즉 언론 자유화 정책 덕분에 언론은 이전에 일반 사람들이 짐작했지만, 확실히 알 수 없었던 사실들을 제대로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련 언론들은 이때부터 미국이나 일본처럼 잘 사는 나라의 생활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자본주의 나라 국민들이 즐기는 정치적 자유도 전해줬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론은 공산당의 타락과 부패, 인민들에 대한 억압과 탄압의 실상도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1980년대 초 대학에 입학했을 때, 거의 모든 소련 공산당 창시자들이 1937년 스탈린숙청 당시 스탈린에 의해 피살된 것을 알았습니다. 저처럼 역사에 관심이 있었던 대부분 지식인이 알았습니다.

하지만 기술자나 자연과학을 하는 지식인, 평범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물론 그들은 1917년 혁명 이후 공산당이 감행한 대량학살을 알 수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말에 들어와 이 사실이 다 알려졌고, 대부분 사람이 공산당의 역사가 학살과 숙청, 탄압과 만행의 역사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 때문에 1990년,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에 대한 항목을 헌법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논쟁이 시작되자 모스크바를 비롯한 소련의 대도시에서 엄청난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모스크바에서 50~6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시위에 참여한 모스크바의 노동자, 지식인, 기술자, 하급 간부들이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일당제를 폐지하고, 공산당의 권력 독점을 없애야 한다는 요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아닌 기타 가맹공화국과 일부 자치공화국에서도 민족주의 운동과 독립운동의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 가맹공화국들에서 왜 독립운동이 시작됐나요? 언제부터 그랬을까요?

[란코프 교수] 가맹공화국의 상황은 지역별로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발틱 가맹공화국들은 처음부터 공산당 정권이 러시아의 제국주의 정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발틱 국가들과 같은 태도는 예외적이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부터 가맹공화국에서 민족주의가 강해지기 시작했고, 원래 생각하지도 않았던 독립에 대한 희망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이든 카자흐스탄이든 그렇습니다.

1980년대 경제위기가 심각해지자, 가맹공화국들은 문제가 생긴 이유를 러시아 사람들이 지배하는 정권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희망은 러시아 정부와 다를 바가 없는 소련 정부가 이들 지역을 통제할 없게 된다면, 그들은 매우 있다는 겁니다. 흥미롭게도 소련이 붕괴한 이후 쉽게 있던 것은 이러한 희망이 대부분 환상이었다는 겁니다.

지금 독립국가가 15 가맹공화국 가운데 대부분은 러시아 연방만큼 살지 못합니다. 하지만 1980년대 가맹공화국 사람들은 독립이 경제적 기적을 가져올 알았습니다. 가맹공화국의 간부들도 독립에 대한 희망을 크게 지지했습니다. 독립국가에서 대통령이 되는 것은 가맹공화국의 책임비서보다 좋은 일이 아닐까요? 결국 1991년에 들어와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 실패가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소련 붕괴는 시간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지난 시간에 이어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개혁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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