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붕괴와 민족주의 (1)
2018.11.13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소련의 붕괴와 민족주의 (1)>
- 소련 붕괴 이후 15개 가맹공화국으로 분리
- 민족주의 강한 소수민족은 자신을 위한 행정단위 설립
- 소련 헌법도 가맹공화국의 주권 인정∙가맹공화국마다 특권도 존재
- 갈수록 심해지는 민족주의 갈등에 점점 멀어진 통합과 번영
소련의 개혁개방을 주도했던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시대가 끝나고 소련은 15개 가맹공화국으로 분리됐습니다. 이때부터 각 가맹공화국은 각자 역사와 문화, 언어 등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꿈꿨는데요. 가맹공화국마다 사정은 달랐다고 합니다. 15개 가맹공화국의 모습은 어땠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지난 시간에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시대가 끝나고, 1991년 겨울에 소련이 15개 가맹공화국으로 분리됐다는 내용까지 살펴봤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92년이 아니라 1922년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1917년 러시아제국이 무너졌을 때 약 140개 정도의 소수 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중에는 민족의식이 너무 강해서 독립을 희망했던 소수 민족이 있었고, 민족의식이 약하거나 독립 생각이 없던 소수민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1917년 혁명 때 국제주의 원칙을 믿던 공산당은 한편으로는 러시아제국의 영토를 모두 통제하고 싶은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레닌과 다른 공산당 사상가들이 제안한 전략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독립운동을 가로막기 너무 어려운 일부 지역, 예를 들어 폴란드와 핀란드의 독립은 인정했지만, 레닌과 공산당은 소비에트공화국을 연방국가로 만들었고 규모가 큰 소수민족 대부분이 가맹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 사람은 우크라이나 가맹공화국이 있었고,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카자흐 가맹공화국이 있었습니다. 1930년대 말부터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15~16개의 가맹공화국이 있었습니다. 또 흥미롭게도 가맹공화국마다 내부 소수민족이 있었습니다. 그루지야 가맹공화국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압하스라는 소수민족이 또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가맹공화국 안에 자치공화국이나 자치 구역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소련은 15개 가맹공화국으로 구성된 나라입니다. 가맹공화국마다 소수민족이 많지 않은 지역에서는 일반행정 단위,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특별자치 지역이 있었습니다.
- 교수님. 설명을 듣기만 해도 아주 복잡한데요.
[란코프 교수] 기본 생각은 대부분 소수민족, 특히 민족의식이 강한 소수민족이 자기 국가로 생각할 수 있는 행정단위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 레닌과 공산당 지도부가 희망했던 것은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 사람이 자신의 민족국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 가맹공화국을 만든다면 독립운동 생각이 거의 없어질 것이란 희망입니다. 물론 15개 가맹공화국 가운데 민족의식과 독립 경향이 큰 지역도 있었고, 이러한 경향이 거의 없는 지역도 있었습니다.
- 가맹공화국이나 자치지역은 어떤 권리와 특권이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이론상 권한이 많았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소련 헌법에서 가맹공화국의 자결권을 인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가맹공화국이 합법적으로 독립을 요구한다면, 소련 정부는 그 가맹공화국을 완전히 독립된 국가, 즉 주권국가로 인정할 생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당시 공산당은 모든 것을 통제했기 때문에 소련 사람은 이러한 일이 있을 수조차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맹공화국마다 현지 민족 출신은 출세나 발전, 특권 등이 있었습니다. 1950년대 이후 가맹공화국의 공산당 책임 비서는 무조건 그 가맹공화국의 소수민족 출신입니다. 가맹공화국에서 현지 언어로 나오는 도서와 출판, 방송 등은 국가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경우 공식 문헌은 무조건 러시아말과 가맹공화국 말을 동시에 사용했습니다.
중학교 제도는 가맹공화국별로 차이가 컸지만, 어느 가맹공화국이든 현지어를 사용하는 학교가 있었습니다. 러시아말로 교육하는 학교라 해도 현지 언어는 의무 과목이었습니다. 저도 중학교 때 우크라이나에서 학교에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러시아 사람만 살았던 마을이지만, 마을에서는 매주 우크라이나 말 수업이 4~5번 정도, 우크라이나 문학을 2~3번 배웠습니다.
- 교수님 설명을 들어보면 가맹공화국은 여러 특권과 권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 러시아 민족의 불만이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이에 대해서는 대답하기 조금 어렵습니다. 한편으로 갈수록 가맹공화국의 특권이 유명무실화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1930년대 말부터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사람을 비롯한 슬라브계 민족 출신들은 출세와 발전 등에서 보이지 않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대부분 가맹공화국은 중앙 정부에서 많은 후원을 받았는데, 이 후원은 바로 러시아 가맹공화국 예산에서 나온 돈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러시아 사람들, 특히 1960년대부터 생긴 러시아 민족주의자 세력들은 기타 소수민족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가맹공화국 지식인들 가운데 소련을 새로운 러시아제국으로 보는 시선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갈수록 내부 갈등은 심각해졌지만, 1970-80년대에 대부분 가맹공화국에서 독립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소수나 극소수였을 뿐입니다.
- 교수님. 소련 중앙당국은 여러 민족의 불만에 대해서 어떤 대책이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1960년대부터 소수민족 중 반소련∙반러시아 감정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을 때부터 중앙정부의 우려가 없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소수민족을 러시아화하는 정책을 하기도 하고, 동시에 그들의 불만이 생기지 않도록 소수민족 문화를 많이 지원했습니다. 약간 모순이 있어 보이지만, 당시에는 이렇게 했습니다. 1960~70년대에 소련공산당 지도부가 제일 위험하게 생각했던 지역은 발틱 3국,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그리고 에스토니아입니다. 이들 지역에서 언제나 불온한 기운이 매우 심했습니다. 한편으로 중앙아시아에서는 민족의식이 비교적 약했고, 중앙에서 나오는 지원이 많아서 독립의식이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 교수님. 소련의 15개 가맹공화국마다 역사와 문화, 그리고 언어까지 상황이 매우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소련 정부는 소련민족을 만들어 낼 생각이 없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있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소련민족은 아니지만, 많은 민족으로 구성된 소련 인민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소련사람 대부분은 앞으로도 같은 나라에서 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서로 대립하는 민족의식이 강해졌고, 소수민족의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러시아 사람의 민족주의도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이 민족주의 경향은 애초 지식인들 사이에서 생겼지만, 나중에 간부들의 지지까지 받게 됐습니다.
결국, 1980년대부터 가맹공화국들은 서로 믿지 않고 적대감까지 느끼게 됐습니다.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자 대부분 사람은 고생만 하는 다른 가맹 공화국들과 갈라섰기 때문에 머지않은 미래에 잘살게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됐습니다. 왜 그런지,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소련에서 분리된 15개 가맹공화국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