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사건(3) - 무력 진압의 시작

워싱턴-노정민 nohj@rfa.org
2018-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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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5일 천안문 광장에서 탱크의 진입을 막고 있는 한 시민.
1989년 6월 5일 천안문 광장에서 탱크의 진입을 막고 있는 한 시민.
Photo courtesy of Wikipedia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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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건(3) 무력 진압의 시작>

- 반체제 시위의 본거지가 된 천안문 광장

- 시위대 내부에서도 갈등과 대립 생기기도

- 시위대에 대한 강경 진압 시도

- 장갑차와 탱크 앞세운 군대, 천안문 광장에 진입

 

중국에서 발생한 민주화 시위를 중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한 천안문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국민의 경제생활은 나아졌지만, 특권층의 부정부패와 빈부 격차에 불만을 가진 국민을 중심으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민주화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천안문 사건의 발생 원인부터 내용, 의미를 살펴볼 텐데요, 오늘 세 번째 시간입니다.

-  교수님, 1989년 4월말에 중국에서 전례없이 규모가 큰 청년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위는 천안문 광장에서 시작되었는데요. 참가자들은 고급간부들의 비리와 경제정책을 비판했고, 민주화와 자유를 요구했습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부에는 강경파도 온건파도 있었는데요. 당시에 중국공산당 총비서였던 조자양은 시위대와 협력해야 하고, 그들의 요구를 일부라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잘 아는 것처럼 결국 강경파가 우세했는데요. 왜 그랬을까요?

[란코프 교수] 1989년 5월 초순부터 천안문광장은 지속적인 반체제 시위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시위대는 천막을 설치하고 아예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확성기를 설치하고 방송을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상징물로 자유의 여신상도 만들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것은 미국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베낀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시위 지도부의 학생들 사이에서의 갈등은 갈수록 심각해 졌습니다.

- 교수님. 그들 사이에는 왜 내부 대립이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좋아하든 싫어하든 우리는 세계 혁명 역사를 보면 혁명세력의 내부에서 갈등이 생기는 것은 거의 불가피한 일처럼 보입니다. 당연히 1989년에 천안문에 모인 중국학생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것처럼, 학생들은 주로 지식인들을 위한 이런저런 특권을 요구했고, 지식인들의 정치적 영향력과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고자 하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한 젊은 노동자들은 당시 중국에서 매우 심각해지고 있던 빈부격차와 사회양극화 문제를 기본목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학생들은 사실상 국가가 경제를 적게 통제하면 좋다고 생각했지만, 노동자와 일부 사무원들은 시장화 개혁을 반대하고 모택동 시대의 평등한 사회를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매우 심한 모순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생운동 지도자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공산당정권에 도전하지 않고 그냥 부분적인 개혁을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사실상 공산당체제를 무조건 해체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갈수록 시위 지도부 내부에서의 권력다툼이 심각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개인야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결국 공산당 지도부의 온건파가 그들과 타협을 시도했을 때도, 시위 지도부들은 통일된 입장을 준비하지도 못했습니다. 수많은 경우 공산당 대표자들을 마구 비난하고 공격했습니다. 예를 들면 5월 18일에 이붕 총리와 고급간부들은 학생들과의 회담에서 무시와 압박을 받았습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올바른 혁명가들이라고 생각했지만, 고급간부들에게 이 사건은 문화대혁명 시대의 홍위병을 연상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공산당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중국방문은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 고르바초프의 중국방문은 왜 문제가 되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5월 15일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북경을 방문했습니다. 중국 외교의 입장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방문이었습니다. 소련 최고지도자는 30년만에 처음으로 중국에 왔습니다. 그 30년동안 중국과 소련은 사이가 매우 나빴습니다. 이때 중국공산당은 소련과의 외교를 정상화하고, 어느 정도 가까운 관계를 맞을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르바초프 환영 행사는 천안문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이미 천안문광장은 천막과 수만 명의 시위자들이 장악 한 상태였습니다. 중국지도부는 그들에게 임시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는데, 시위대측은 이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행사장소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고르바초프를 취재하기 위해 수많은 외국기자들이 왔고, 그들은 북경의 혼란을 전세계에 열심히 보도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이 큰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 교수님, 공산당 지도부는 짜증과 불만이 아주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중국 최고 권력자는 조자양 총서기가 아니라 등소평인데요. 그의 태도는 어땠을까요?

[란코프 교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등소평은 처음부터 강경파를 좀더 지지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는 문제를 폭력없이 해결할 희망이 없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군사작전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5월 하순에 들어서 등소평은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위참가자들은 자신들이 평화적 운동이라고 주장했지만, 갈수록 요구가 많아지고 있었고, 그들은 점점 더 큰 양보를 요구했습니다. 이를 본 공산당 지도부가 조만간 이 운동이 공산당정권을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당연히 최고 지도자였던 등소평은 이것이 큰 위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 등소평은 공산당이 무너진다면 발전하기 시작한 중국경제도 무너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는 천안문 시위 때문에 강대국 건설이 실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지금도 앞으로도 이 걱정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5월말부터 등소평의 명령에 따라 25만명의 인민해방군 병력이 북경 방향으로 오기 시작했습니다. 등소평과 강경파는 시위 진압 작전을 계획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 학생과 시위대들은 군대가 오기 시작한 것을 알았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즉시 알았습니다. 사실상 군대를 동원하기 전에 이미 소문이 났습니다. 그 때문에 갈등이 더 생긴 것입니다. 일부는 군대와 싸울 수 없다며 해산을 주장했고, 일부는 끝까지 천안문 광장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6월3일 오후 4시 반, 공산당 수뇌부는 마지막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중국 군부대가 다음날 오전 1시에 천안문광장에 들어가서, 아침까지 거기에 있는 모든 시위자들을 강제적으로 제거하는 것입니다. 시위대가 저항이나 항쟁을 한다면, 사살할 권리를 군대에 부여했습니다. 6월 4일 새벽에 군대는 장갑차와 탱크를 앞세우고 천안문 광장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 드디어 장갑차와 탱크를 앞세운 군대의 진압이 시작되는 것 같은데요. 등소평과 강경파는 군사작전을 계획, 승인했는데, 그들은 반체제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폭력을 써야 한다는 입장이었나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그렇습니다. 강경파 대부분은 체제가 무너진다면 그들도 아무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정확한 평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벌써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들은 혼란스러운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지 않는다면 경제발전도, 나라의 안정과 통일도 유지할 없다고 생각한 같습니다. 객관적으로 이것이 사실일지 방법이 없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한 천안문 사태의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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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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