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사건(4) – 민주화 시위 vs 폭력 진압

워싱턴-노정민 nohj@rfa.org
2018-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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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4일 중국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운동 28주년을 맞아 홍콩 빅토리아공원 축구장에서 11만 명이 참가한 희생자 추모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지난해 6월 4일 중국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운동 28주년을 맞아 홍콩 빅토리아공원 축구장에서 11만 명이 참가한 희생자 추모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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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건(4) 민주화 시위 vs 폭력 진압>

- 천안문 시위 진압 방법에 공산당 지도부 고민

- 북경 시내에 진압한 군대, 무력으로 시위대 진압

- 천안문 사건으로 숨진 사람, 정확한 집계 없어

- 전 세계적으로 크게 보도됐지만, 중국에서는 언급 없어

 

중국에서 발생한 민주화 시위를 중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한 천안문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국민의 경제생활은 나아졌지만, 특권층의 부정부패와 빈부 격차에 불만을 가진 국민을 중심으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민주화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천안문 사건의 발생 원인부터 내용, 의미를 살펴볼 텐데요, 오늘 네 번째 시간입니다.

- 교수님, 저번 시간에 1989년 봄에 벌어진 중국 북경의 정치위기를 살펴보았습니다. 당시에 수십만의 시위자들은 천안문광장에 모여서 정치개혁과 민주화,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를 없앨 것을 요구했습니다. 공산당 수뇌부는 이 시위를 진압하기로 결정했다고 하셨는데요. 그렇지만 우리 청취자들이 생각할 때 공산당 정권이 이 만큼 큰 시위를 몇 주 동안 진압하지 못한 것은 사뭇 이상해 보입니다. 공산당 수뇌부는 왜 이들을 즉시에 탄압하지 않았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우리 청취자 여러분들은 공산주의 나라라면 모두 다 북조선과 비슷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북조선만큼 자신의 국민들을 엄격하게 통제, 감시, 진압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1980년대 중국은 오늘날 북한보다 자유가 훨씬 많았습니다. 많은 중국 사람들은 체제를 비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1989년 4월에 천안문에서 대규모 반 공산당 시위가 열렸을 때 일부 공산당 수뇌부는 학생시위를 옹호하기까지 했습니다.

한달 반 가까이 수뇌부 내부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온건파는 대화와 타협을 시도하고, 밤낮으로 천안문광장에서 시위를 하는 수 만 명의 시위대를 평화롭게 해산시킬 희망 했지만, 갈수록 타협에 대한 희망이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강경파들은 이 시위를 진압하지 않는다면, 중국이 혼란에 빠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들은 시위대에게 양보한다면, 자신들의 권력과 특권 그리고 부정부패로 얻은 이익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5월말에 25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북경 주변에 대기시켰고, 6월 3일 오후 공산당 지도부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명령이 내려지자, 군대는 6월 3일 밤에 북경시내에 진입했습니다.

- 교수님, 북경시민들은 어떻게 생각했나요? 그들의 반응이 무엇일까요?

[란코프 교수] 처음에 중국군대가 천안문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많은 시민들은 그들을 가로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버스나 전차를 이용해 장애물을 만들고, 도로를 막았고, 사람들도 길을 막고 장갑차와 탱크들을 막으려 노력했습니다. 6월3일 밤 북경 여러 곳에서는 총소리가 많이 났습니다. 곳곳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분위기를 보면, 시민 대부분은 시위를 지지하지 않아도, 진압은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북경 시민들은 당연히 탱크나 장갑차 수백대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진압군은 6월4일 새벽에 계획대로 천안문 광장에 도착했고, 처음에는 확성기로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군대를 보고 시위대 일부는 광장을 떠났지만 일부 시위대는 오전5시나 6시까지 광장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 교수님, 해산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운 시위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천안문 광장 여러 곳에서 끔찍한 무력충돌이 생기고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병사들은 학생들과 교수들을 때리거나 다른 폭력행위를 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사방에 시체와 피냄새가 많이 났는데, 탱크와 장갑차가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6월 4일 아침에 수많은 시위자들은 다시 광장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군관들은 경고를 했지만, 시위대는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군대는 총을 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그 후에 천안문광장에 시위대는 한 명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 천안문에서 숨진 사람들은 몇 명인가요?

[란코프 교수] 물론 확실한 통계는 없습니다. 중국정부에게 확실한 통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영원히 공개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국정부는 7월 말에 218명이 사망했다고 했고, 흥미롭게도 중국 당국자들은 사망자 대부분이 학생과 시위대라고 인정했습니다. 중국정부가 발표한 부상자는 7000명 정도인데, 당연히 이 통계는 거짓말입니다. 사실상 공식통계를 믿는 사람이 공산당 지도부 가운데에서도 한 명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사상자를 적게는 400~500명, 많게는 1천명이라고 생각합니다.

- 중국공산당은 시위자들을 어떻게 다루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천안문 사건 직후에 시위를 주도한 학생 대부분이 체포되어 투옥됐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형기는 7~10년입니다. 대부분의 시위 지도자들은 나중에 석방되어 미국이나 대만 등 해외로 떠나갔고, 지금도 해외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정치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정치에 대해 관심이 작아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청취자들은 시위 학생들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일 것입니다. 북조선에서 조금만 시위를 준비하더라도 그 사람들과 그의 가족, 친구 모두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목적은 중국사회에 교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훈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지만, 개혁개방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등소평의 남중국 방문, 소위 남순강화입니다.

- 교수님, 외국들은 이 끔찍한 천안문 진압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란코프 교수] 천안문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한 진압은 세계에서 크게 보도가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민주화를 믿는 사람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당시에 세계 곳곳에서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끔찍하고 참혹하게 시위를 진압한 나라가 없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는 큰 충격을 받았고, 중국에게 이런저런 정치 경제 제재를 가했고, 2-3년동안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중국의 경제발전 때문입니다. 고속 성장하는 중국은 매력이 많았습니다. 중국과 무역과 경제협력을 한다면 막대한 돈을 있다는 것을 누구든지 알았고, 결국 후에 거의 모든 제재가 해제되었습니다. 그래도 외국 나라 대부분은 사건 이후 중국에서 도망친 시위자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 중국 국내에서 천안문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란코프 교수] 벌써 25 가까이 사건은 중국에서 이야기도 없는 주제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는 금지된 주제이고, 중국 일반 평범한 사람들은 사건이 있었던 것조차 모릅니다. 물론 지식인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기억합니다. 흥미롭게도 지금까지 천안문광장은 엄격히 통제되는데, 밤에는 일반인들은 들어갈 수도 없고, 사복경찰들만 돌아다닙니다.

- 네, 오늘은 교수님과 함께 천안문 시위에 대한 무력진압 그리고 천안문 사건에 대한 국내외 평가에 대해서 함께 살펴봤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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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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