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이 지지한 공산주의 (1)

워싱턴-노정민 nohj@rfa.org
2019.02.26
Communist_International-620.jpg 1924년 코민테른에 참석한 대표들.
Photo courtesy of Wikipedia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지식인이 지지한 공산주의 (1)>
- 잘 사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산주의 혁명 성공
- 서방 혁명을 돕기 위한 조직 ‘코민테른’도 탄생
- 1920~30년대에 좌파 성향 지식인 우세
- 공산주의 정권의 만행도 인정하지 않아


공산주의 혁명과 운동이 주로 발전된 서방 자본주의 국가에서 시작된 사실을 아십니까? 특히 지식인 중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는데요.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를 지지한 이유와 배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공산주의 운동은 원래 소련이나 중국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발전된 서방 자본주의 국가에서 시작됐습니다. 또 마르크스는 원래 공산주의 혁명이 발생하는 나라는 러시아, 중국처럼 봉건 국가가 아닌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된 영국이나 독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소련 혁명 이후 전 세계의 공산주의 운동은 소련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요. 그렇다면 서방 공산주의 운동은 어땠나요?

[란코프 교수] 1917년에 소련 공산주의 운동이 발생했을 때 레닌을 비롯한 소련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해서 모든 진실을 잘 아는 예언자들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예언이나 레닌의 기대와 달리, 선진국의 자본주의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은 잘 못 사는 나라에서만 성공했습니다. 또 잘 사는 나라에서 사회주의 경향이 커지기는 했지만, 혁명보다 진화와 민주주의 발전으로 진전했습니다.

그래서 1920년대 초 레닌과 소련 공산당은 서방 혁명을 도와주기 위해 특별한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 조직은 코민테른, 즉 국제공산당이라 불렀습니다. 코민테른의 활동은 주로 1920년대 들어와 본격화됐습니다.

- 교수님. 코민테른이란 말은 북한 공산주의 운동과 깊은 관계가 있는 말 같습니다. 코민테른은 주로 어떤 일을 했나요?

[란코프 교수] 코민테른은 쉽게 말해 세계 공산당입니다. 그들의 기본 목적은 공산당 사상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당연히 당시 코민테른의 공작원들은 여러 나라로 가서 그 나라의 좌파 지식인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공작금과 도서를 제공했으며 결국, 그 나라에 공산당이 생길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사실상 1920년대에 중국 공산당이나 미국 공산당은 물론 조선의 공산당까지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소련에서 나온 코민테른의 돈에 의해 창립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흥미롭게도 당시에는 자칭 공산당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공산당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우선 코민테른에서 인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인정을 받지 못한 단체는 공산당으로 활동하지 못했고, 당연히 모스크바에서도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1920년대의 조선 공산주의 운동을 보면, 음모와 다툼, 내분이 정말 많았습니다. 서로 반대했던 여러 단체는 모스크바에서 유일한 조선공산당으로 인정받기 위해 매우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 교수님. 유럽과 북미에서 코민테른은 어떤 활동을 했나요?

[란코프 교수] 소련은 1920년대 초에 유럽에서 코민테른을 통해서 혁명 공작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 모든 유럽 국가에서 공산당이 창립됐습니다. 1920년대 초 독일에서는 혁명적 운동의 힘이 매우 컸고, 소련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당시 소련은 독일이 공산국가가 된다면 짧은 기간 이내에 유럽 전체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희망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소련 공산당이 농촌에서 강탈했던 막대한 돈은 사실상 낭비가 됐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 말에 들어와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는 유럽에서 많이 높아졌습니다. 특히 지식인들이 공산당을 아주 많이 지지했습니다.

- 지식인들이 공산당을 많이 지지했다고 하셨는데요. 왜 그랬나요?

[란코프 교수]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전 세계 어디에서나 잘 사는 나라에서는 교수나 지식인 중에 좌파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1920~30년대에는 이같은 경향이 매우 심했습니다. 기본적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계 역사에서 전례가 거의 없는 만성적이고 아주 심각한 경제위기입니다. 많은 사람이 당연히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해 실망이 매우 컸고, 이에 대한 대안을 찾았습니다. 둘째는 파쇼와 극우익 세력의 등장입니다. 당시 이탈리아와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극우익 세력이 등장했는데, 히틀러처럼 극우익 지도자들이 항상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공산주의를 많이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파쇼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동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930년대 초에 들어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처럼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에서 공산당이 많이 커졌고, 제2차 세계대전 때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력은 최고치에 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교수님. 좌파 경향의 지식인들은 파쇼정권의 반민주주의 테러를 보고 분노했습니다. 같은 무렵 소련의 농촌에서는 당국자들의 수탈과 만행으로 수백만 명의 농민이 굶어 죽었고, 약 100만 명이 숙청된 스탈린 대숙청도 있었습니다. 좌파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나요?

[란코프 교수] 그들 대부분은 이 사실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소련은 고립정책을 시행했고, 외부 사람들은 소련 내부의 상황을 알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소문은 있었습니다. 많은 농민이 굶어 죽었다거나, 1917년에 혁명을 지도했던 대부분 사람이 체포되거나 피살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소문을 확인할 증거는 1950년대 중반까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지식인들과 사상가들은 이같은 소문이 모두 반동세력이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주장했고. 1950년대 말에 소련 정부가 이를 인정해서야 마지못해 이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1930년대에 대부분 좌파 지식인은 이 같은 숙청과 테러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소련 내부 상황을 잘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소련에 대한 환상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들은 소련이 농민과 노동자들이 잘살고,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나라로 생각했습니다.

- 그렇다면 교수님. 소련은 공산주의 혁명을 여전히 도와주려 노력했나요?

[란코프 교수] 그건 아닙니다. 1920년대 말부터 소련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태도를 점차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의 지도자가 된 스탈린은 세계혁명을 이루는 것보다 소련이라는 나라를 초강대국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서방 공산주의 운동, 그중에서도 지식인들이 지지한 공산주의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도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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