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의 망명자/이주자들(2)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9.05.21
break_wall_peep-620.jpg 서독 사람들이 구멍난 장벽으로 동독 경비대를 들여다 보고 있다.
Photo courtesy of Wikipedia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교수님, 지난번 시간에 동유럽 사람들의 해외 망명과 도피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동구라파에서 정치 위기가 생길 때마다 해당국의 인민들이 다른 나라로 도피해 갔다고 하셨는데요, 그 배경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합니다.

란코프 교수: 제일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동구라파 공산국가들 대부분은 공산당정권이 튼튼했을 때 해외로 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그리 크지 않았고, 국경경비가 매우 엄격했습니다. 하지만 가끔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서 자유가 많고 잘 사는 자본주의국가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우리가 공산주의 역사를 보면, 민중들이 공산당 정권에 도전한 사례는 주로 세 개 있었습니다. 첫째는 1956년 웽그리아입니다. 둘째는 1968년 체코입니다. 셋째는 1980년대 초 뽈스카입니다. 1956년 웽그리아 인민봉기도, 1968년 체코 민주운동도 대량망명을 불러왔습니다. 1980년대 초 뽈스카는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그러나 상황보다 중요한 것은 지리입니다.

전: 지리적인 위치가 망명과 도피에 영향을 준다는 말씀 같은데요.

란코프: 지도를 먼저 봐야 합니다. 1980년대초 뽈스카는 국경을 접한 자본주의 나라가 없습니다. 서쪽은 동독입니다. 동쪽은 소련이고 남쪽은 체코입니다. 북쪽은 바다입니다. 반체제 사람들이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반대로, 1956년 웽그리아 인민봉기 당시에, 20만명 정도의 망명자들은 해외로 갔습니다. 그들은 주로 오스트리아로 갔는데, 흥미롭게도 2-3만명 정도는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했습니다.

전: 유고슬라비아는 공산국가인데, 공산국가에서 공산국가로 도피한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

란코프: 당시에 유고슬라비아는 공산국가이기는 했는데, 다른 공산국가들과 관계가 매우 복잡하고, 정치노선도 특수했습니다. 1956년에 유고공산당은 웽그리아 인민봉기를 반동들의 반란이라고 보지 않았고, 왜곡된 정치노선에 반대하는 민중봉기라고 판단했습니다. 유고공산당은 웽그리아 공산당을 반대하는 민중들을 많이 지지하지 않았지만, 많이 반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망명자들은 유고슬라비아에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전: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럼 1968년 체코의 대량 망명사태는 어떤 상황에서 일어난 겁니까?

란코프: 1956년 웽그리아와 규모와 상황까지 비슷합니다. 1968년에 체코는 큰 혼란에 빠져 버렸습니다. 폭력이 거의 없었는데, 민주화운동은 소련과 기타국가의 무장간섭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그 때문에 약 20만명 정도의 체코사람들은 해외로 망명했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사례는
동도이췰란드입니다.

전: 동서로 분단된 도이췰란드의 공산권 국가 동독 주민들의 망명 말씀이군요.

란코프: 그렇습니다. 1945년 이후에 도이췰란드는 조선반도처럼 분단국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국경감시가 거의 없었습니다. 50년대 초까지 누구든지 동독을 떠나서 서독으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서독에서 동독으로 갈 수도 있었고, 실제로 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당연히 동독에서 서독으로 간 사람들보다 아주 적었습니다. 1950년대 들어와 국경이 생겼지만, 아직 너무 큰 구멍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구멍은 바로 수도인 베를린입니다.

전: 베를린이라면 당시에 ‘육지 섬’이라고 불린 곳이 아닌가요?

란코프: 네 그렇습니다. 1945년 패전 이후에 동독의 제일 중심에 위치한 베를린은 두 개의 지역으로 분리되었습니다. 동부 베를린은 도이췰란드 민주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서부 베를린은 미국, 영국, 프랑스의 통치지역이지만, 사실상 서독 도시입니다. 문제는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이 생겼을 때까지, 베를린사람들은 누구든지 언제나 동부에서 서부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버스를 탈 수도, 걸어갈 수도, 지하철을 탈 수도 있었습니다. 서부 베를린에 도착하고, 망명을 신청하고, 아무 문제없이 서독이나 다른 나라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간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독으로 갔나요?

란코프: 1948년부터 1961년까지 서독으로 간 동독 주민들은 350만명입니다. 쉽게 말하면 매년 30만명씩, 매일 거의 1000명씩 나라를 떠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동독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특히, 좋은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과 기술자들이 많이 떠났습니다.

전: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한 사람들 중에 왜 지식인들이 일반 사람들보다 더 많았을까요?

란코프: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동독보다 서독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소득수준이 매우 높았습니다. 평민들도 물론 그랬지만, 지식인들 소득수준의 동서 격차는 훨씬 심했습니다. 둘째로 지식인들은 정치적 자유와 언론자유를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일반인들보다 더 많이 동독을 떠났습니다.

전: 자국 시민들이 계속해서 서도이췰란드로 빠져나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동도이췰란드 당국자들은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란코프: 1950년대말까지 공산주의사상을 굳게 믿던 동독 지도자들은 조만간 서독을 따라잡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서독과 동독의 생활수준격차, 소득격차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1961년에 동독 정부는 베를린장벽을 건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장벽을 건설한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동독 사람들, 특히 동독 기술자, 의사, 교수, 학자들이 자본주의세계로 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베를린장벽이 생긴 다음에, 당연히 자유롭게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베를린은 완벽하게 두 개로 나눠졌고, 도시 내부에 큰 벽이 생겼습니다.

전: 그럼 베를린 장벽이 생긴 다음에는 탈주자들이 많이 줄었습니까?

란코프: 많이 줄었습니다. 장벽은 어느 정도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동독에서 서독으로 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1961년부터 89년까지 65만명 정도가 갔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매년 2만명 이상이 갔습니다. 그 전에 매년 30만명이 간 것을 감안하면, 15분의 1로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서쪽으로 갔습니다.

전: 동독인들이 다른 주변 국가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왜 주로 서독 쪽으로 갔을까요?

란코프: 기본적으로 같은 민족이어서 다른 동구라파 나라 사람들보다 서독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독에 있는 이산가족도 많았고, 서독에 가는 동독인들은 서독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공산국가 동독은 북조선과 달리 쇄국정치를 거의 하지 않았고, 동독사람들은 서독방송을 잘 보고, 심지어 서독 신문까지 가끔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서독 상황을 잘 알았습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도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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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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