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KGB와 공작원들 (2)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9.12.24
kgb_cadets-620.jpg 1972년 소련 10월 혁명 당시 퍼레이드를 하는 KGB 사관생들.
Photo courtesy of Wikipedia

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 교수님, 지난 시간에 1920-30년대 각국의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굳게 믿어서 나라의 기밀을 소련 공작원에게 그냥 가져다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당시에 소련은 슬라브계 사람들을 해외파견 공작원으로 잘 쓰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왜 그랬을까요?

란코프: 언어와 문화 때문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미국 정보기관 사람들 가운데 백인 미국인이 많을 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당시에 소련에서도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첩보활동을 담당한 소련 공작원은 프랑스 출신이며, 뽈스카, 즉 폴란드에서 첩보활동을 담당한 공작원도 역시 폴란드 출신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1930년대 초 소련 정치 정보 기관 즉 체카와 오게페우의 지도부는 폴란드 출신이었습니다. 군사정보국 책임자도 러시아가 아니라 라트비아 출신자였습니다. 코민테른의 책임자는 불가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전: 당시에 소련 공작원들은 어느 나라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을까요?

란코프: 미국과 영국입니다. 프랑스에서 성공은 그리 많지 않았고, 소련이 제일 힘을 많이 쏟은 나라는 독일인데요, 사정이 좀 복잡합니다.

전: 소련 공작원들이 미국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성공을 거두었을까요?

란코프: 1930년대말 미국 대학생 가운데에서, 젊은 지식인들 가운데서 공산주의를 굳게 믿던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미국은 아직 고립주의 시대인데, 세계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련과의 대립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젊은 사람들은 소련 공작원들이나 외교관들에게 비밀 자료를 노출하거나 전달해도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1930년대 말 그 사람들은 당시에 좌파 경향이 많은 루즈벨트 행정부에서 중급, 고급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1990년대 부분적으로 공개된 구소련 정보기관 기록을 보면, 1930년대 미국에서 소련을 위해 간첩활동을 하는 고급 공무원, 고급 간부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았습니다.

전: 소련이 미국에서 얻은 가장 큰 정보는 무엇이었나요?

란코프: 1940년대 초 소련 정보기관은 심지어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 회의에서 생긴 이야기까지 매우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소련입장에서 보면 보다 더 중요한 성공은 미국 핵무기에 대해서 매우 정확한 자료를 수집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핵개발을 하는 과학자들 가운데 여러 유럽나라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공산주의 사상을 믿는 사람도 참 많았습니다. 원래 소련 정보기관에 의해서 포섭된 사람들도 몇 명 있었는데요, 그들은 나중에 비밀리에 자료수집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을 포섭했습니다. 당시에 몇 명이 노출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로젠베그 부부입니다.

전: 로젠베그 부부라면 미국의 대표적인 국가반역자가 아닌가요? 스파이 행위로 체포돼 나중에 사형당했지요.

란코프: 그렇습니다. 당시에 매우 시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로젠베그 부부는 체포되어서 벌을 받았지만, 당시에 로젠베그 부부와 같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흥미롭게도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 좌파 역사학자들과 지식인들이 로젠베그 부부의 무죄를 많이 주장하고, 그들이 미국 정보기관에 의한 희생양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공개된 소련 문서들을 보면, 로젠베그 부부는 진짜 소련 간첩이었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추가 사실이 있습니다.

전: 어떤 사실인가요?

란코프: 로젠베그 부부는 별로 중요한 간첩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냥 운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진짜 중요한 간첩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은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코헨입니다. 그는 당시에 소련학자들이 보다 훨씬 더 빠르게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 정보를 많이 수집했고, 소련으로 보냈습니다. 오늘날 러시아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코헨 한 사람 때문에 소련이 2-3년 더 빨리 핵개발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코헨이 소련에 준 정보는 소련 국익에 진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코헨은 당시에 체포되지 않았는데, 1960년대 말 노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나중에 그를 구조했고, 코헨과 그 부인은 소련에서 영웅 칭호를 받고 잘 살았습니다. 코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성공적인 소련 간첩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사람들은 자신들을 국가반역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전: 교수님, 진짜 미국 입장에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겠습니다.

란코프: 당연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소련 정보기관에게 있어서 진짜 영광의 시대였습니다. 미국의 소박한 지식인과 학생들 덕분에 소련 국가는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물론 미국뿐 아니라, 기타 국가에서도 비슷한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두 번째로 큰 성공은 영국에서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 영국에도 미국 만큼이나 소련 간첩들이 많았습니까?

란코프: 솔직히 말해서 영국은 미국 만큼 중요한 나라가 아니지만, 소련 정보기관으로서는 보다 더 큰 성공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사건은 캠브릿지 5인조 사건입니다. 당시에도 오늘날도 캠브릿지 대학은 제일 좋은 대학교 중의 하나입니다. 그 대학에 입학한 사람이면 졸업 후 거의 확실히 유명한 학자나 인기있는 작가나 고급공무원, 외교관이 됩니다. 그 때문에 1930년대 소련 공작원들은 캠브릿지 학생들을 포섭하려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소련 공작원들은 마침내 머리가 아주 좋고 장래성이 많은 다섯명을 포섭했습니다.

전:  이들 학생 다섯명이 졸업 후 사회에서 어떤 일을 했는 지 궁금합니다.

란코프: 그들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은 킴 필비입니다. 그는 나중에 영국 정보기관의 간부가 되었고, 출세길을 달렸습니다. 사람들은 나중에 그가 영국 정보기관 책임자가 될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킴 필비는 특히 미국 CIA와의 연락 책임자가 되었는데, 결국은 당시에 미국의 극비 정보까지 소련이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1명도 정보기관에 들어갔고, 1명은 외교관이 되었습니다. 존 케른크로스는 처음에 외교관이 되었지만, 얼마 후 재무성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앤서니 블런트는 흥미로운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흥미롭게도 블런트는 미술사학자가 되었습니다.

전: 그렇군요. 그런데 미술사학자가 소련 공작원들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란코프: 가치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미술사학자 블런트는 1940년대 몇 년동안 영국 정보기관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냥 미술사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최고 수준 미술사학자인데다가 가문이 아주 좋았습니다. 귀족 출신입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권력이 많은 사람들과 매우 쉽게 친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블런트는 이런 저런 영국 고위층들의 대화를 쉽게 들을 수 있었는데, 이것들은 잘 정리하면 매우 고급 정보가 되었습니다. 영국 왕실과도 친했습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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