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화단(畵壇)과 평양화단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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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최고의 미술창작단체인 만수대창작사 소속 공훈예술가 최명식 화백이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북한 최고의 미술창작단체인 만수대창작사 소속 공훈예술가 최명식 화백이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분단 후 북한 미술계, 즉 평양화단에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예술사조로 알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가을 전시회가 한창일 화가들 활동무대인 화단(畵壇) 이야기를 펼쳐볼까 합니다. 오늘도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합니다.

임채욱 선생: 화단이라면 그림 그리는 화가들의 사회를 말하지요. 화가들 만남의 장소이고 작업실 이야기가 펼쳐지는 활동무대가 화단이지요.

그림 그리는 화가들 무대라면 화단에는 조각이나 공예, 그리고 건축 같은 다른 미술 분야는 포함되지 않나요?

임채욱 선생: 넓은 의미에선 화단이라면 미술분야를 다 망라한다고 봐야지요. 그림뿐 아니라 조각이나 공예, 건축이 다 들어간다고 봅니다. 다만 오늘 이 시간엔 그림만으로 한정해서 언급하는 게 좋겠군요.

네, 사실 미술이라고 하면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미적 표현 모두가 대상이니까 너무 범위가 넓어요. 가급적 회화라고 하는 그림 이야기로 제한해 보지요.

임채욱 선생: 분단 후의 남북한 관계는 모든 것이 이질화됐다니까 미, 그러니까 아름다움을 보는 눈도 당연히 달라졌으리라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럽지요. 미의식이 달라진 부분이 분명히 있지요. 하지만 달라지지 않은 면도 또한 확인하게 됩니다. 가령 북한의 어떤 그림에 의도가 읽히더라고 그림 자체가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그게 예술이지요. 북한에서 그림을 선전용으로 그렸다든가, 전쟁 중에는 심리전 수단으로 활용했다고 하면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보다는 남북한의 화풍이 어떻게 다르게 발전해 왔는가 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북한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풍이 주체사실주의로 바뀌고 한국에서 사실주의 구상화를 벗어난 비구상, 추상화 세계가 열렸다든가 하는 변화의 모습이지요.

북한에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당연히 주된 화풍이 됐던 것 아닐까요?

임채욱 선생: 그렇지요. 분단 후 북한 미술계, 즉 평양화단에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예술사조로 알았습니다. 선대통치자 김일성도 1951년 12월에 이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몇 년 뒤 김일성은 조선화, 즉 전통적인 우리 그림을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북한미술계는 조선화를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풍으로 그려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지요. 그런데 조선화, 우리 전통회화는 산수를 그린 것이거나 꽃과 새를 그린 화조화가 많은데 이런 그림들은 대개 색채를 쓰지 않고 묵으로 그린 것이 많다 보니 평양화단에서는 채색화를 그릴지 수묵화를 그릴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김일성은 이런 고민을 알기나 했던 것처럼 수묵화로 그리지 말고 색채를 써서 화려하게 그리라고 말합니다.

본래 우리나라 전통그림은 채색화가 아니라 수묵화였습니까?

임채욱 선생: 채색화보다 수묵화가 전통적인 모습이였지요. 평양화단도 처음엔 전통그림 조선화를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니까 수묵화가 전통이라고 여겨서 그걸 모범으로 하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김일성이 친절하게도 수묵화는 인민들 감정과 맞지 않고 대상을 진실하게 보여주지 못한다면서 채색화를 그리도록 했지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주체사실주의로 바뀐다고 말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임채욱 선생: 북한에서 1960년대가 되면 많은 것이 바뀝니다. 정치적으로 국내파 공산당이나 남로당 공산주의자, 심지어 소련파 공산주의자도 사라집니다. 혁명전통이란 이름으로 김일성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모이던 시기였지요. 말하자면 김일성 유일사상체계가 형성돼 간 것이지요. 문화분야에서도 초기에 소련을 따라 배우자라던 구호가 사라지던 때니까 미술에서도 주체가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1970년대가 되면 문학 예술분야에서 주체사실주의가 확립되게 됩니다.

그림에서 주체사실주의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임채욱 선생: 그림에서 주체사상을 구현했다는 그림은 산업건설의 주역인 노동자라든가 전쟁 때 후방에서 싸우는 군인을 지원하는 모습을 긍정적 주인공이 되도록 묘사하고 있지요. 김성민이란 화가가 그린 <지난날의 용해공>은 제철소 용해공 즉 용광로에서 주물을 취급하는 주물공이란 뜻을 가진 용해공을 그린 그림인데 뜨거운 열기를 붉은색과 황색으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남강마을의 녀성들>(김의관)이란 작품은 볏짚을 이고 소를 이끄는 여성과 장총을 잡고 볏짚을 진 여성을 그렸는데 전쟁 중 후방 여성들의 싸우는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그럼 화제를 서울화단으로 돌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서울화단이 걸어온 길을 간단하게라도 훑어주시죠.

임채욱 선생: 광복 후 서울화단은 전통그림에 침투된 일본화 풍을 벗어나는 것이 당면과제였는데 1949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미술전람회를 통해 역량 있는 신인들이 대거 등장해서 서울화단을 이끌면서 이를 극복하게 됩니다. 특히 한국화 부문에서 새로운 창조기법 기운이 솟아나면서 오늘날 서울화단을 형성시킵니다. 이들은 해외의 추상미술에 영향을 받으면서 이를 전통 한국화에 접목시키면서 전통의 혁신을 도모했지요. 서울화단은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만의 화풍을 벗어나서 여러 화풍을 실험하는 도가니가 돼 옵니다. 뭣보다 많은 수의 화가들이 해외로 나가서 새로운 실험을 많이 한다는 것이 서울화단의 특징일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는 평양화단의 그림을 전시한 일도 많지요? 서울화단의 그림이 평양에서 전시된 일은 없을 텐데 이런 것은 미술교류라고 하기 어렵겠지요?

임채욱 선생: 여러 번 있었지요. 처음에는 해외동포들이 소장한 평양화단의 미술품들을 대여해와서 전시했지만 근래에는 평양화단에서 직접 가져오기도 하지요. 분단 후 북한당국의 승인을 받고 평양화단의 그림을 가져와서 전시한 것은 1992년 5월이고 물론 그전에도 몇 차례 전시품들을 가져온 일은 있었지만, 정식으로 가져온 것은 이때가 최초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시회는 대개 평양화단의 그림들을 남쪽전시장에 전시하는데 끝나는 그런 행사였지요. 반대로 서울화단의 그림들이 평양화단이나 주민들에게 소개된 일은 없었습니다. 이러니 서울과 평양의 교류라 말할 수는 없지요.

앞으로 서울화단과 평양화단이 그림교류가 통일문화 형성에 기여하려면 어떤 자세여야 할까요?

임채욱 선생: 서울화단으로서도 평양화단에서 배울 것이 많이 있겠지요. 그림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이 만나야 좋지요. 서로 다르고 서로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다 보면 문화변용(Cultural Acculturation)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현상대로 서로 배우고 닮아가면 그게 통일문화로 가는 지름길이 되지요. 주체의 틀에 갇혀있는 평양화단에도 새로운 바람이 들어갈 수도 있지요. 쉽지 않더라도 그런 방향으로 교류의 틀을 잡아가야지요. 학문이나 문학예술이 역시 남북 가교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는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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