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의 근세의 역사인물관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9-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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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한치진 박사의 임시정부 사진 앞줄 왼쪽부터 안창호, 한치진, 백영엽(목사·전 평안북도 지사), 손정도(목사·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
독립운동가 한치진 박사의 임시정부 사진 앞줄 왼쪽부터 안창호, 한치진, 백영엽(목사·전 평안북도 지사), 손정도(목사·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
사진-연합뉴스 제공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나라 역사상의 인물에 대해서 남북한에서 보는 평가는 어떤가를 짚어봤습니다. 오늘은 근대 이후 개화기, 그리고 민족항일기 인물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도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합니다.

임채욱 선생: 이 시기 나라가 일제 식민지로 되자 나라를 찾으려는 애국열사, 지사가 수없이 넘쳐났습니다. 이 가운데서 먼저 안창호를 거명해 봅니다. 안창호는 1905년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맺자 미국에서의 애국활동을 접고 귀국합니다. 국내에서 구국활동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요. 활동은 애국계몽운동과 민족산업 육성으로 전개되지만 주로 교육을 통한 민족혁신을 도모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도 3개나 세우면서 자기개조와 민족개조에 앞장섭니다. 그런 한편 여러 애국독립사건에도 연루돼서 감옥을 드나들게 되고 결국은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별세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고 그가 세운 흥사단은 지금도 한국에서 그의 뜻을 받들어 활동을 합니다.

북한에서는 안창호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임채욱 선생: 북한에서 낸 조선대백과사전에 안창호의 이름은 없습니다. 아마도 민족개량주의자 정도로만 볼 것입니다. 한 북한 자료에서는 안창호를 이렇게 말합니다. 안창호가 1927년 2월 상해에서 만주땅 길림에 와서 한 500여명의 청중을 두고 애국연설을 하는데 그때 길림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김일성이 반박하는 질문장을 써서 내밀었더니 그걸 받아 든 안창호의 손이 후들후들 떨리고 낯빛이 파래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알리는 그림도 유화로 그려서 혁명역사연구실에 걸어뒀습니다. 그런데 연설회는 있었지만 학생이 서면질문을 한 사실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허동찬, 김일성 평전, 북한연구소 pp160~164) 질문내용은 안창호 주장처럼 교육과 산업진흥으로 되겠느냐, 일제를 때려 부숴야하지 않겠나, 하는 거였다는데 30년 가까이 연설을 해온 안창호가 이런 질문에 떨 일은 아니지요. 김일성을 부각시키려고 이런 조작을 하는 거지요.

네, 그럼 다음은 누구를 볼까요.

임채욱 선생: 안창호보다 1년 늦게 태어난 안중근의사를 보지요. 북한에서도 안중근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한 애국열사로 일단 평가를 합니다. 그의 애국문화운동이나 지조를 지킨 점들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희생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국권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탁월한 지도자의 지도를 못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그 ‘지도자’라는 사람은 안중근 보다 20년이나 늦게 태어난다지요. 한국에서는 안중근 동상과 기념관이 여러 군데 세워지고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그의 유해를 찾는 일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누구입니까?

임채욱 선생: 김구와 이승만을 볼까요?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한국에서는 조금 엇갈리고 있지요. 이승만의 나라 만들기에 김구의 외면을 부각시키는 부류가 있고 김구의 통일국가 건설 노력을 이승만이 막았다는 견해도 있지요. 북한에서는 김구가 민주애국자이고 이승만은 친미매국역적이지요. 김구도 중국에서 돌아 온 뒤 반민주주의 길을 걸었으나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무슨 회의에 참석하고 김일성을 만난 뒤 연공합작의 길에 나섰다고 말합니다. 공산주의자를 의심하던 김구가 김일성을 만나고는 나중에 과수원이라도 하나 달라고 할 정도로 친밀감을 지니게 됐다는 겁니다. 북한 문건에 있는 내용입니다.

정치인 아닌 인물에 대해서도 찾아주시죠.

임채욱 선생: 그럼 문학가 이광수나 학자이고 문인이던 최남선을 언급해 볼까요? 몇 년 전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단체에서 이광수 호를 딴 춘원 문학상을 제정하려다가 반대에 부딛쳐 못한 일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광수를 친일문인으로 규정하는 관점이 아직 크지요. 초창기 한국문학계에 끼친 공로보다 민족개량주의적 사상이라든가 친일적인 행동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지요. 북한에서도 춘원 이광수는 민족허무주의, 사대주의, 부르죠아적인 연애지상주의로 청년들 사상정신생활에 해독을 끼쳤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일본의 식민지 동화정책과 침략전쟁을 뒷받침하는 죄를 지었다고 규정합니다. 선대통치자이던 김일성은 이광수가 재간은 좀 있지만 아주 나쁜 짓을 했다고 언급 합니다.

다음 육당 최남선에 대해서도 양가적인 평가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한국에서는 문화와 언론출판 등 다방면에 걸쳐서 큰 자취를 남긴 학자이고 문화운동가로 자리매김합니다. 물론 일본의 침략전쟁에 호응하는 활동도 했음을 지적하고도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문화계몽운동에 참가했다거나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는 것까지는 사실대로 언급을 합니다. 그렇지만 1920년대 후반기부터 친일반동의 길에 들어서서 민족정신에 해악을 끼치는 글을 쓰면서 일본의 침략정책에 적극 협력하는 민족반역의 죄를 저질렀다는 평가를 더 강조합니다.

춘원이나 육당의 경우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보는 관점은 비슷한 것 아닙니까?

임채욱 선생: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요. 그러나 한국에선 춘원이나 육당의 행적에서 잘못을 3이라 보고 공이 7이라고 한다면 북한에서는 공과 과가 반반으로 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북한에선 인물 선정에서 업적보다 사상성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인물선정 기준으로 볼 때 타당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지요. 또 다른 인물은 어떤 사람들을 소개할 수 있습니까? 레슬링선수 역도산을 말해볼까요? 역도산은 세계 프로레슬링계를 제패한 우리나라 사람이지요. 15세 때인 1939년 일본에 가서 일본씨름 선수로 활동하다가 1951년부터는 프로레슬링 선수로 이름을 떨칩니다. 월등한 체력과 태권도 실력으로 서양선수들을 때려눕히는 승리를 보면서 전쟁패배로 기죽었던 일본국민을 환호하게 했지요. 함경남도 출신으로 본명은 김신락입니다. 1963년 1월에는 한국을 방문해서 감회 깊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해 겨울 일본청년의 칼에 찔린 뒤 복막염으로 눈을 감습니다. 북한에서는 역도산에 대해 1959년에 시작된 재일교포들 북송 이후 알게 됩니다. 김일성도 역도산에 대해 알게 됐고 역도산이 김일성에게 벤츠 선물도 했습니다. 이런 역도산에 대해 북한에서는 아주 대단하게 평가하면서 열사증도 주고 인물로 소개도 자주 합니다. 무엇보다 그의 제자였던 일본사람 안토니오 이노끼를 친북인사로 만들어 북한을 돕는 일에 나서게도 했지요.

어느덧 시간이 다됐군요. 끝으로 한마디를 더 붙인다면?

임채욱 선생: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지만 사실자체, 다시말해서 팩트만은 정확하게 말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팩트 자체를 틀리게 하는 경우를 봅니다. 어떤 사상적인 틀에 맞춰 서술하려다 보니 그런 일도 생깁니다. 사실 등소평이 모택동에 대해 잘못이 3이라면 공은 7이다라고 평가했듯이 공과 과를 정확히 구분하기도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도록 노력은 해야 하겠지요.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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