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축구에서의 남북한 참가는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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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박두익(왼쪽)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탈리아 경기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키고 있다.
북한의 박두익(왼쪽)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탈리아 경기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키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월드컵축구가 온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16강전이 끝나고 8강전으로 들어갑니다만 흥미 있는 보도도 쏟아지는 가운데 한국과 북한과 관련된 것도 보입니다. 영국의 한 언론은 월드컵 88년 역사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이변 10개 경기를 뽑았는데, 그 중 2위가 이번에 한국팀이 독일팀을 2대 0으로 이긴 것이였습니다. 또 1966년에 북한팀이 이탈리아를 이긴 것도 4위에 들어갔습니다.

임채욱 선생: 흥미있는 보도였습니다. 이 가운데 한국팀은 한 가지 더 있지요. 2002년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한일월드컵 때 16강전에서 한국이 이탈리아를 2대 1로 꺽은 것이 6위에 올라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10개 경기 가운데 남북한이 차지한 것이 3개고 그 중 2개 경우가 이탈리아와 관련되는군요.

이 10개 경기 중 1위가 4년전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독일이 브라질을 7대1로 꺽고 우승한 것입니다. 이런 독일을 이번에 한국이 꺽었으니 대단한 일이지요.

임채욱 선생: 이런 것을 두고 경천동지(驚天動地)라고 할 수 있지요.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일 정도로 큰 일이였지요. 현재 세계 1위인 독일이 한국에 무릎을 꿇은 것은 사람들의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니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은 독일을 80년 만에 16강에 못 올라가게 만든 팀이 돼서 세계 축구역사에 새로운 기록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그럼 북한이 1966년에 이탈리아를 이겨서 일으킨 충격도 설명 해주세요.

임채욱 선생: 북한은 그 때 구 소련과 칠레, 그리고 이탈리아와 한 조였는데, 소련에 3대 0으로 지고 칠레와는 1대 1호 비겼는데 세 번째 경기를 이탈리아와 치르게 됩니다. 이 시합에서 북한은 1대 0으로 이탈리아를 꺾어 버립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이지요. 이탈리아팀은 1934년과 1938년에 우승한 세계적인 강팀이였는데 북한에 졌으니 온 나라가 난리가 났지요. 그 때 이탈리아는 선수 한 명이 부상으로 나가서 10명으로 시합을 하게 돼서 힘들게 시합한 것이지요. 그때는 부상선수 교체제도가 없어서 부상을 입으면 대체를 하지 못했습니다. 골을 넣은 북한선수 박두익은 ‘아시아의 진주로 불렸지요.

그때 북한 성적은 어떠했습니까?

임채욱 선생:  1승1무 1패로 8강전에 나갔지요. 그때는 출전 국이 24개국이니까 조별로 2팀이 바로 8강전으로 나갔습니다. 8강전에서 북한은 포르트갈을 만났지요. 북한이 먼저 3골을 넣습니다. 야단났지요. 북한 중계방송 아나운서는 북조선만 해도 이런데 통일이 돼서 남조선 힘까지 보태지면 얼마나 좋겠느냐면서 흥분했지요. 그런데 유세비오란 걸출한 선수 때문에 단번에 경기가 뒤집혀버립니다. 3대 5로 북한은 패배를 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이탈리아를 이긴 것은 10대 사건으로 남았군요. 그 뒤 북한의 다른 월드컵 출전사를 말씀해 주십시오.

임채욱 선생: 북한은 어쩐 일인지 이 이후로는 아시아권에서만 좋은 성적을 내다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출전하게 됩니다. 영국 월드컵 이후 44년만이지요. 세계 최강 브라질에 1대 2로 패했지만 잘 싸웠고 포르투갈을 만났는데 0대 7로 지고 맙니다. 북한으로서는 44년전 영국에서 3대 5로 역전패한 상대라서 ‘또다시 1966년처럼, 조선아 이겨라’라는 구호를 내걸고 싸웠지만 크게 지고 조별 리그에서 탈락합니다. 이때 한국은 박지성을 앞세워 그리스를 이기고 16강전에 진출하지요.

북한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출전으로 월드컵에 2번 나가게 됩니다. 한국은 10번을 나갔다지요?

임채욱 선생: 한국은 1954년에 처음 월드컵에 나간 이후 1986년부터는 연속으로 9번을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10번을 나간 것이지요. 아시아에서는 제일 많이 나간 나라이지요. 성적은 2002년 한일월드컵 때 4강을 한 것이 가장 좋지요.

2002년 한일월드컵은 아주 오래 된 경기가 아니어서 기억을 다 합니다만 1954년 월드컵 경기 같은 것은 기록을 찾기 전에는 잘 알지 못하지요.

임채욱 선생: 네, 그렇습니다. 1954년이면 6.25전쟁이 끝난 다음 해가 되지요. 스위스 월드컵인데 요즘처럼 홈 앤 어웨이 방식이어서 아시아권에서 출전 신청한 일본과 한국이 왔다 갔다 해야 하지요. 그런데 반일감정이 깊었던 이승만대통령이 일본 팀이 한국땅을 밟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바람에 한국팀이 일본에 가서 2차례(54. 3) 시합을 합니다. 1차전 5대1, 2차전 1대1로 1승 1무승부로 한국은 출전권을 얻습니다. 그 때 선수들은 일본에 지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오였다는데, 다행히 몸을 던지지 않아도 됐던 겁니다.

본 경기 참가는 어떻게 됐습니까?

임채욱 선생: 그 해 6월에 경기가 시작되는데 스위스에 가는 것도 힘이 많이 들었지요. 미군 군용기로 일본 도꾜에 갔고 거기서 갈아타고 또 갈아타면서 64시간 만에 도착했을 때는 개막식도 끝났을 때지요. 짐도 풀기 전에 유니폼 갈아입고 항가리와의 첫 시합에 나서서 0대 9로 대패를 합니다. 2차 터키전도 0대 7로 지고, 3차 서독전은 시합도 못하고 돌아오지요. 그 때 항가리는 푸츠카츠라고 불세출의 선수가 있어서 그 해 우승한 서독도 항가리에 3대 8로 졌습니다. 100여개의 항가리 슈팅을 막아낸 한국키퍼 홍덕영에게 상대선수가 다가와서 가슴을 만져봤다고 하지요. 100여개 중 9개가 들어갔으니 대단한 골키퍼로 알려졌습니다. 그때 장내아나운서가 전쟁이 끝난 나라 한국이라고 성원을 부탁하자 스위스 사람들은 식품, 의류, 시계, 돈을 다퉈 가져왔다고 합니다.

정말 눈물겨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한국은 월드컵 출전을 못하게 되는군요.

임채욱 선생: 한국팀 패배를 본 유럽 축구인들은 수준이 낮은 아시아, 아프리카 팀을 월드컵대회에 출전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냈다고 합니다. 그 때 FIFA회장이던 쥘 리메가 이렇게 반박했다고 합니다. “지금 한국같은 나라가 형편없이 무너졌다 해도 수 십 년 뒤에는 전혀 모를 일이다” 과연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로부터 48년뒤 한국은 월드컵대회를 직접 개최했고 4강을 했습니다.

이번 독일전 숭리는 북한주민도 알까요?

임채욱 선생: 아마도 알게 되겠지요. 경기장면을 북한주민에게 보여 줄 가능성도 있지요.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 한국 승리 때도 사후에 중계방송을 한 일이 있으니까요.

최근 남북한 간에는 축구교류를 하자는 말도 오고 가는 것 아닙니까?

임채욱 선생: 아마도 그렇겠지요. 우선 엊그저께 통일농구시합이 평양에서 있었지 않습니까? 축구가 아닌 농구가 선택된 데는 북한통치자가 농구를 좋아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요. 전 통치자 김정일은 축구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는 축구발전에 대한 ‘불멸의 업적’(역사과학 2015. 1호)을 세웠다고도 하는데 사상전, 투지전, 속도전, 기술전을 강조했고 이게 지금 북한 스포츠의 원칙처럼 돼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월드컵축구를 또 한 번 열려고 한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임채욱 선생: 아 그건, 한국대통령 제안이라는데,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과 일본 이 4나라가 2030년쯤 월드컵축구를 공동개최를 하면 동북아시아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지 않겠느냐 하는 뜻이라고 합입니다. 아직은 구상단계이고 실현여부는 불투명하지요.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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