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시대 문자에 대한 남북한의 관점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9.10.07
dangoon_tomb_b 평양 단군릉 앞에서 진행된 북한 개천절 기념행사.
/연합뉴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고려시대까지는 신지문자, 신지글자로 쓰였지만 이를 한자로 옮겼고 그래서 내용을 알게 된 것이지요.

10월입니다. 10월에는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개천절이 있고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을 기념하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데 단군이 세운 나라 단군조선 때도 우리 고유글자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 글자가 한글을 만들 때도 참고 됐다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한글 이전에 있었다는 단군시대 글자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도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합니다.

임채욱 선생: 네, 신지글자를 말하는군요. 신지(神誌)문자라는 게 있는데, 단군시대 그러니까 고조선 시대에 쓰였다는 글자입니다. 현재 50여 자가 알려지고 있는데 그 뜻이 해석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무슨 부호 같기도 한 이 글자는 <평양지>, <영변지> 같은 읍지에 나옵니다. 읍지는 고을의 역사, 지리, 풍속을 기록한 책이지요. 그리고 한글을 만들 때 참고가 됐다는 말은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신지글자라고 하는데 신지는 무슨 뜻인지요?

임채욱 선생: 고려 때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신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신비비사>라는 책이 남아 있었다는 표현인데 신지가 지은 비밀스런 책이라는 뜻이지요. 이 때 신지가 사람 이름이 아니라 기록을 담당하는 벼슬이름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아무튼 신지가 쓴 책이고 그 책에 쓰인 글자가 신지글자라는 것이지요.

그 글자 내용은 알려졌습니까?

임채욱 선생: 그 글자의 내용은 고조선 시대 때 환인, 환웅, 환검(단군)을 제사 지낼 때 맹세하는 말, 백성들의 복을 빌고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는 말, 농사짓는 것, 제사를 지내는 것의 중요성을 적은 글자들이라고 합니다. 제사 지낼 때 맹세하는 말은 서효사(誓效詞)라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봄제사 다짐 노래>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내용인데 왜 신지가 지은 비밀스런 책이 됩니까?

임채욱 선생: 그건 고려 숙종 때 김위제라는 사람, 이 사람은 술수가라고 할 사람인데, 그가 이 책 <신지비사>가 단군으로 부터 왕조가 9번 바뀐다는 예언을 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로부터 이 책은 아주 조심스럽게 대해야 되는 책이 되고 조선조에서는 금서로도 됐습니다.

앞에서 신지글자를 해석 못한다고 했는데 이런 내용은 어떻게 알려졌습니까?

임채욱 선생: 고려시대까지는 신지문자, 신지글자로 쓰였지만 이를 한자로 옮겼고 그래서 내용을 알게 된 것이지요. 가령 조선시대 문신 이맥이 지은 <태백일사>라는 책에도 이런 내용이 한자로 옮겨져 있다고 합니다.

앞에서 <평양지>, <영변지>에 나온다고 했는데 어떻게 설명되고 있습니까?

임채욱 선생: <평양지>는 평양의 연혁이나 산천지리를 기록한 읍지인데 임진왜란 2년 전에 출판된 책이지요. 이 책에 기록된 내용인즉 법수교란 다리에 옛날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여기 글자가 범어문자도 아니고 중국 글자인 전(篆)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언문자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글자가 신지글자라고 믿었다는 것이지요. 또 <영변지>에는 신지문자 16자가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지글자가 한글을 만드는데 참고가 됐다는 것은 맞습니까?

임채욱 선생: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글을 만들기 전에도 한자 아닌 글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적어도 한자가 들어오는 4세기까지는 이런 글자가 지배층에서는 쓰였으리라고 봅니다. 한자가 들어온 이후 이런 글자는 무시당해서 민간전승으로만 남았을 수 있지요. 이게 신지글자인데 세종때까지도 남아있었습니다. 한글 창제에 깊숙이 관여한 정인지가 지은 <훈민정음 해례>에서 새로 만든 글자가 옛 전(篆)를 모방했다고 썼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 자를 한자의 전 자로 생각 할 필요가 없이 신지문자를 그렇게 표현했다고 볼수 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한글 글꼴이 지금까지 알려진 신지글자 꼴과도 닮은 것들이 한자 전 자 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신지글자를 계승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참고는 됐으리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근거는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중에 성삼문을 명나라 어학자 황찬을 13번이나 만나서 토론케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있던 동방의 문자들을 검토했을 터이니까 이 때 신지글자도 참작됐을 것이란 겁니다.

이런 견해는 일반화 된 것입니까?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남북한에도 있습니까?

임채욱 선생: 한글이 옛날 민간에서 쓰던 신지글자를 계승해서 만들었다는 주장을 한 학자는 광복 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조선어학회에서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참여했던 권덕규는 일찍이 <정음 이전의 조선글>이란 글에서 신지문자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그는 단군 때 신지가 지은 비사가 전해지고 평양 법수교 비문이 신지글자로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문화유씨 족보에 부여시대 왕문이란 사람이 쓴 문자가 법수교 글자와 비슷하다고 나와 있으며 단군조선 이후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에 이르기까지 고유한 문자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예를 하나 하나 들고 있습니다. 다 소개를 못합니다만 어떻든 이런 글자들이 고구려가 당나라에 패해서 멸망할 때 당나라 장수 이적이 우리 역사책을 모두 불살라 버렸고 한자가 들어 온 뒤 우리글자를 박해해버려서 그 흔적만 남았다는 주장입니다.

현재 남북한에서도 신지글자가 한글창제에 참고가 됐다는 주장을 합니까?

임채욱 선생: 신지글자에 대한 연구는 북한 언어학자들이 많이 하고 있습니다. 유열이란 학자가 가장 앞서고 있습니다. 권덕규와 함께 활동하던 사람이었는데 6.25땐가 북한으로 갔지요. 그는 앞에서 말한 <영변지>에 보이는 16글자가 한글과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8세기 발해사람 대야발이 지은 <단기고사>라는 책과 14세기 이암이란 사람이 지은 <단군세기>란 책에는 가림토 글자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단군조선 3대왕 가륵왕 때 38글자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신지글자가 발전된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유열은 가림토 모양이 한글과 매우 흡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지글자는 가림토 글자와 한글을 만들어 내게 한 우리 민족의 시조글자라고 못을 박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견해가 있습니까?

임채욱 선생: 한국에서는 재야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펼칩니다만 아직 일치된 관점으로는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신지글자 수집에도 관심을 쏟아야 하고 해독하기 위한 연구에도 힘을 많이 기울여야 되겠습니다. 남북한 어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런 문제를 해결할 때가 언젠가는 오겠지요. 오늘 살펴 본대로라면 한글을 창제할 때 신지글자를 바탕 삼았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참고는 했다는 것 아닙니까? 참고를 했던 안 했던 간에15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좋은 글자인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업적은 빛날 것입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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