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기자가 본 인권] 1억 중국인에게 피해 준 문화대혁명
2023.12.27
<탈북기자가 본 인권> 진행에 정영입니다. 북한 청취자 여러분은 이웃 국가인 중국에서 벌어진 문화대혁명에 대해 중국 화교들이나, 출장자들을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중국정부도 가르치지 않고, 북한 교과서에도 기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 시간에는 중국에서 근 1억명이 피해를 본 문화대혁명에 대해 책 ‘슬픈 중국’의 저자인 캐나다의 맥매스터 송재윤 교수로부터 들어보겠습니다.
기자: 오늘은 ‘슬픈 중국’ 2권에서 다룬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좀 알아보겠습니다.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벌인 배경은 무엇입니까?
송재윤 교수: 모택동이 대약진 운동에서 실패한 다음에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반성했어요. 그리고 권력에서 일단 물러나죠. 마오쩌둥은 류소기와 등소평에게 행정 실무를 맡기고 자기는 뒤로 물러나서 있었는데, 류소기와 또 등소평은 시장 경제를 어느 정도 도입을 합니다. 사람들이 장마당에 나가서 물물 교환도 하고 이러면서 생활이 좀 윤택해지는 거죠. 1962년부터 1966년까지 4년 동안 경제 개혁이 일어나고 류소기가 상당히 강력한 지도자로 등장해 경제 개혁과 정치개혁이 동시에 일어나는 분위기가 있으니까 모택동이 조급해진 거죠. 그래서3~4년 잠잠해 있다가 자기가 권력을 잃어버릴 것 같아 문화혁명을 일으키게 됩니다.
기자: 어떤 방식으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습니까?
송재윤 교수: 마오쩌둥이 어떤 논리를 들고 나오냐면 “지금 공산당 정권을 수정주의자들이 장악했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수정주의자들이 누구냐면 자기가 국가 주석으로 앉혔던 류소기와 그리고 자기가 밀었던 등소평인데 이 사람들의 정책이 경제적으로 성과를 보이니까 모택동이 조급해진 거죠. 그래서 이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한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짭니다. 그 당시에 소련에 후르시쵸프가 등장을 하면서 수정주의로 갔다고 얘기를 하죠. 그러면서 현 중국 지도부가 공산이념을 버리고 자본주의로 가려는 거다, 자본주의를 되살리려는 자들이다 이러면서 실용주의자로 몰았는데 이 사람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모택동이 화려하게 정치적으로 부활을 하기는 좀 어렵죠. 그러니까 대중을 선동해야 된다는 것인데 대중 선동에 있어서는 전 세계 역사에서 모택동을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송교수는 모택동이 우선 1964년부터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라는 걸 벌이고, 1965년 11월에 자기 밑에 있는 선전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비평가들을 끌어 모았다고 말합니다.
송재윤 교수: 그중에 한 명이 자기 부인입니다. 강청이요. 그다음에 야오원위웬(姚文元 )이라는 사람이에요. 야오원위엔이라는 사람은 한 30대 중반의 사람인데 이 사람이 한 역사학자가 쓴 시곡을 비판을 하면서 수정주의가 문예계, 학계, 정치계 모든 중국 전역에 퍼져가지고 독초처럼 자라고 있다 이런 식의 신문 칼럼을 써가지고 투쟁을 전개 합니다. 그의 신문칼럼이 퍼져나가면서 결국은 젊은 사람들한테 옮겨가게 되고 젊은 사람들이 이 모택동의 암시를 받아 들고 일어나서 비판 투쟁을 벌이는 양식으로 전개가 됩니다.
송교수는 이때부터 중국에서 인민재판식 정적 제거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송재윤 교수: 대반란은 어떤 형식으로 하는 가 하면 학교에서, 관공서에서, 아니면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을 잡아다 놓고 비판 투쟁을 벌이는 양식으로 전개가 됩니다. 북한에 계시는 우리 동포들께서도 잘 아실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정치운동이라는 게 있죠. 공산사회에서는 거기에 인민재판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 인민재판을 중국에서는 뭐라고 불렀냐 하면 비판 투쟁이라고 했습니다. 왜 비판투쟁이라고 했냐면 모택동 사상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떻게 공산주의적 인간형을 만들 수 있느냐?”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택동은 비판과 자기비판이라고 그랬어요. 내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이 뭐겠습니까? 제가 잘 아는 사람을 비판을 하게 만드는 거죠. 그러면 제가 제 형제나 제 친구들을 비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또 비판을 당하고요. 이런 식으로 비판을 하면서 적과 아를 구분하는 건데요. 북한에서도 똑같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죠. 사람과 사람의 적이라고 중국에서는 인민과 인민의 적인데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 미국이나 캐나다나 한국이나 일본에 사는 사람들 인민의 뜻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적과 인민을 나눠서 인민이 적을 때려잡는 게 바로 비판 투쟁입니다.
송교수는 문화대혁명이 삽시에 중국 대륙을 휩쓸었고, 무장투쟁으로까지 전개되었다고 말합니다.
송재윤 교수: 이 투쟁이 문화혁명 기간에는 너무나 참혹하게 광범위하게 일어났어요. 첫 번째 전개되는 양상은 홍위병들이 들고 일어나서 학교 선생이라든지 마을의 이장들을 잡아서 인민재판을 하고 그냥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베이징에 있던 홍위병들이 상해로 내려가서 상해 노동자들과 결합을 합니다. 이렇게 여러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무장 투쟁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모택동도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송교수는 중국식 인민재판은 북한에서 벌이는 인민재판과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합니다.
송재윤 교수: 북한의 경험과 중국의 경험이 결코 다르지 않다고 저는 생각을 하거든요. 이 사람들이 내세웠던 것은 사회 공산 혁명이었고 그 다음에 북한이 중국을 보고 배우지 어디를 보고 배우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북한과 비슷한 양상으로 갔던 것 같아요. 당시 북한에서는 천리마 운동이 일어났을 때 중국에서는 대약진 운동이 일어났고요. 그리고 비판과 자기비판이라든지 호상 비판이라든지 사상투쟁, 대논쟁 이건 전부 다 중국에서 나온 겁니다.
1965년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던 시기 북한에서는 1966년부터1970년대까지 갑산파에 대한 대대적인 종파투쟁이 벌어집니다. 갑산파는 량강도 갑산군에 근거를 둔 계파로서, 1930년대 양강도 갑산지구에서 항일지하투쟁에 참가했던 박금철과 리효순 등을 제거하기 위한 숙청작업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부주석을 지냈던 박금철과 노동당 대남비서 리효순 등은 부르주아 사상과 수정주의, 봉건유교 사상을 퍼뜨렸다고 비난을 받고 숙청당했습니다.
그러면 문화대혁명 기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을까? 이어지는 송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송재윤 교수: 중국에서 아주 독특하고 잔혹한 방식으로 진행이 됐습니다. 1978년 중국 정부가 3년 동안 조사를 해서 발표한 자료가 있습니다. 문화혁명 과정에서 정치적 타격을 입은 사람이 1억 1,300만이라고 그렇게 숫자를 발표를 했죠. 조사자료에는 “문화대혁명은 10년의 커다란 겁탈”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10년의 커다란 겁탈은 제가 만든 말이 아니고요. 중국 사람들이 대호겁(劫奪)이라는 말을 직역한 겁니다. 그게 뭐냐면 10년의 대겁탈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 이유는 뭐냐하면 실제로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군사적으로 얘기를 하면 무장 투쟁이 일어났던 것이고요. 서로 대립하는 집단끼리 나중에는 군대에서 무기를 받아가지고 탱크까지 몰고 나와서 서로 죽입니다. 그런 식의 광기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 바로 문화대혁명이고 중국 공산당에서 1978년도에 비공식적으로 발표한 자료가 있습니다. 등소평의 아들도 불교가 될 정도였으니까 어느 정도인지 우리가 그 참상을 알 수가 있는데요. 그리고 정신적으로 불교가 된 사람들이 많죠. 불려나가서 집단 폭력에 노출되면 사람은 평생 가는 상처가 되니까요.
기자: 그러면 문화대혁명 기간에 사망자는 얼마나 될까요?
송재윤 교수: 지금도 사람들이 문화혁명에 대해서 얘기하기를 꺼립니다. 그 문화혁명의 피해를 안 받은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공산당이 1981년도에 문화혁명은 우리가 여태까지 건국 이전에 겪었던 가장 큰 사고였다. 그 책임은 모댁동한테 있다 얘기까지 나왔어요. 사망자를 200만에서 많게는 400만까지 죽었다고 얘기를 하거든요. 실제로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어떤 경우가 있냐면 문화혁명 처음에 보면 처음에 3년 동안은 관을 공격했다 그래요. 뭐냐면 인민들이 일어나가지고 정부를 공격한 겁니다. 근데 그렇게 되니까 모택동이 보기에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면은 정부가 무너질 정도거든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반란을 일으켰으니까 반란범들을 잡아가지고 또 색출해서 처형하는 절차가 또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1969년부터 1972년 가면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또 일어납니다. 그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요.
문화대혁명을 단행했던 젊은 홍위병들도 나중에는 “잃어버린 10년”을 외칠만큼 실망했다고 합니다.
송재윤 교수: 청년들은 처음에는 홍의병이 되어 가지고 날뛰다가 나중에 “시골에 가서 일 좀 해라”고 하니까 그 한마디에 내려갔습니다. 그걸 ‘상산하향’이라고 불렀는데요. 산 위로 가고 마을로 내려간다는 소립니다. 농촌 오지로 가서 사람들이 노동을 하게 되는데 그 노동을 처음엔 재밌죠. 그런데 이 젊은이들이 학교도 못 간 상태에서 7~8년, 나중에는 10년 동안 일합니다. 그래 가지고 대학도 못 가게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완전히 잃어버린 세대이고, 그 세대들이 너무나 분하고 억울해서 나중에 자기들이 썼던 일기장들을 만들어가지고 출판하고 그랬는데 여기에서 빛나는 문학 작품들이 나오고 그걸 우리가 ‘상흔 문학’이라고 합니다. 상처의 흔적이란 말이죠. 그게 바로 문화대혁명입니다.
그러면 그 문화대혁명은 언제 막을 내리게 되었을까?
송재윤 교수: 문화 대혁명은 1966년에 시작을 해서 1976년 마쩌둥이 사망하던 9월 9일날 막을 내리는데요.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마오쩌둥이 죽고 나서 한달이 채 못 된 10월 6일에 4인방이 체포가 되면서 공식적으로 문화대혁명은 종료가 되는데 모택동이 바로 중국 공산당의 당권을 장악하고 있는 권력자들을 뒤집어 업겠다는 반란이었고 그 결과 모택동이 다시 화려하게 부활을 해서 정권을 쥐게 되는 그런 정치 투쟁사를 제가 책에서 그린 것입니다.
기자: 오늘은 여기까지 듣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슬픈 중국’의 저자인 캐나다의 맥매스터 송재윤 교수로부터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관한 내용 들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워싱턴에서 자유아시아방송 정영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