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예진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함경북도 아오지하면 정치범 집단수용소가 있어 한 번 가면 살아나오지 못한다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최금희씨에게는 아오지가 어린시절의 그리운 고향일 뿐입니다. 이제는 제 2의 고향 서울에서 새로운 추억거리를 만들고 있는 금희씨. 그녀의 혼란스럽기만 했던 과거와 당당한 현재, 그리고 두근거리는 미래의 이야기를 희망통신에서 전해드립니다.
이예진:
탈북하신지가 몇 년 됐죠?
최금희:
14년이요. 14살에 탈북 했으니까 만으로 27살이에요.
이예진:
어린 나이에 탈북 하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땠어요?
최금희:
14살 때니까 엄마 아빠가 가자해서 손에 이끌려 간 기억밖에 없고요. 그런데 “왜 가야하지. 고향을 두고 왜 가야 하지.” 했어요. 탈북이라는 말도 여기 와서 알았어요. 2월이라 두만강이 얼어서 엄마 아빠 손잡고 건넜던 기억밖에 없어요.
이예진:
그로부터 14년이 지났잖아요. 그 때랑 지금이랑 어떤 게 달라졌나요?
최금희:
한 마디로 그 땐 전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왜 내가 무서워해야하고 도망 다녀야 하고 한국에선 “왜 북한사람을 몰라. 왜 이상하게 보고 질문만 많이해?” 불평만 하고 부정하다보니 다 싫었어요. 그러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하나하나 벗어던지면서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됐어요.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뀐 나라고 생각해요.
이예진:
고향이 아오지라면서요. 남한에선 아오지는 인식이 안 좋거든요. 하지만 아오지는 그런 곳이 아니라고요?
최금희:
그럼요. 거기는 사람이 사는 곳이고, 제 고향이에요. 서울보다 훨씬 깨끗하고 공해도 없고 산과 들이 있고 풍수지리적으로도 좋은 곳이에요. 어렸을 적엔 배고프지 않을 땐 제 고향이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그 곳을 떠날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죠. 자연적으로도 좋은 곳이고 저의 순수함을 간직하게 해준 곳이라고 생각해요.
이예진:
그런 곳을 두고 부모님이 떠나야겠다는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최금희:
김일성 주석이 돌아가시고 나서 북한사회가 경제적으로 2차 고난의 행군 등 아사로 죽는 사람도 생기고 사람을 잡아먹는 해괴한 일도 생기고 옆집 건너 죽는 사람도 생겼어요. 저희 집만도 네 형제자매가 있는데 어릴 땐 먹는 거에 민감하잖아요. 워낙 다 못살고 먹는 게 없어서 타격이 컸어요. 저는 고생한 건 아닌데 저희 엄마 아빠가 고생하셨죠. 돈도 빌리러 다니고, 쌀도 꾸러 다니고 피도 뽑으셔서 80원 갖고 강냉이 1키로 정도 사고 피를 매일매일 뽑으시고 했어요. 부모님은 살아야겠다 싶어서 중국에서 밀가루를 들여와서 되팔고 했는데 중국에서는 강아지도 이밥을 먹는다는 얘길 들어서 내 자식 굶기지 말아야겠다 싶어서 한 달간 준비해서 떠나게 됐죠. 두만강 건널 때도 다시 며칠 뒤에 돌아와서 친구들이랑 놀아야지 했는데 지금까지 14년째 여기 서울에 와 있네요.
[죽을 고비를 넘기며 오게 된 한국도 사는 덴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정착하기란 쉽지 않죠.]
최금희:
제일 고마운 게 가족이에요. 저희 어머니가 가장 힘들어하셨어요. 이해를 못했어요. 나도 적응하는데 엄만 왜 못해 그랬는데 40년을 한 곳에 살다보면 그 세대 분들은 그렇잖아요. 여기 와서 다시 적응하려면 친구도 친척도 없고 정말 외로울 거 같아요. 주부우울증도 심하잖아요. 의지할 덴 자식밖에 없는데 자식들도 정착한다고 친구들 만나니까 엄만 의지할 데가 없었어요. 우울증도 심해지고 자살까지 생각하셨는데 이번 책에 엄마에 대한 부분도 있어요. 어느 순간에 이제 제가 이해하게 되더라구요. 그냥 화만 내는 엄마였는데 지금은 어디가 아픈가보다. 갱년기인가. 그럼 내가 화내지 말아야겠다 그래서 지금은 엄마로만 봤다가 이제는 여자로 보게 됐어요. 이게 제가 가장 적응 잘 하게 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요. 엄마도 아프신 거 빼고 이제 적응 잘하고 있으니까 고맙고 언니는 돈도 잘 벌어서 저한테 용돈도 푹푹 주고 동생은 저보다 공부를 더 잘하고요. 아버진 경비일 성실하게 다니시고. 남부러울 거 없이 잘 살고 있어요.
이예진:
대학에 갈 때도 힘들었을 텐데 어려웠던 점은요?
최금희:
한국에서 대학에 가려면 수능을 봐야하잖아요. 북에서 온 친구들은 수능을 안 봐요. 특별전형이라고 해서 쉽게 들어가요. 쉽게 들어간 만큼 정말 어려웠어요. 그 때까지만 해도 가면 할 수 있어 했는데 만만치 않은 게 한국 애들이었어요. 기계 같았어요. 공부만 한 친구들이라. 서울에 있는 대학이면 명문대라는 허물을 벗은 거죠. ‘나한테 맞지도 않는 옷을 입은 게 아닌가. 내 주제가 뭘까. 얘들과 어떻게 공생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죠. 한국 애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힘들었던 게 한국 친구를 사귀는 거였어요. 어떻게 친구가 되냐. 편하지가 않았어요. 왜일까 하다가 1학기가 지나서 알았어요. 아 우리가 다르구나. 다를 수 밖에 없구나. 그러면 이 애들과 친해지려면 뭐가 있어야 하지 하다 보니 공통점이 없는 거예요. 한국 고등학교를 안 나왔으니까 공감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공감을 쌓자 해서 애들이랑 중국 여행을 갔어요. 힘들게도 여행을 했지만 공감대도 생겨나더라고요. 그 때 친구들이랑은 1년 만에 만나도 통해요. 그 때 내가 왜 그랬지 하면서요. 그리고 “남북한도 너무 떨어져 있었어. 빨리 만나서 추억거리를 만들어야해.” 라는 생각이 들어요.
[힘들게 자신을 찾아간 금희씨는 북한인권국제대회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글로 상을 받게 됐고, 금희의 여행이라는 책을 통해 솔직한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고백할 줄도 알게 됐습니다. 이렇게 금희씨를 성장하게 만든 원동력이 따로 있었다고 하는데요.]
최금희:
가족 외에 인생에서 가장 큰 디딤돌이라면 셋넷학교거든요. 저는 예전에는 정말 부정적인 애였어요. “왜 날 봐. 북한 애라서 보나.” 눈초리에 독기가 올라 있었는데 그런 나를 받아준 곳이 셋넷학교였어요. 교사들끼리 그런 얘길 했대요. “왜 왔냐. 어디서 왔냐.” 아이들에게 그런 걸 묻지 말자고 했대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셨어요. 우리가 화를 못 참을 때는 조절해주시고 말로 풀 수 있게, 논리적으로 왜 그런지 화가 난 이유가 말해보라는 식이었어요. 제가 처음엔 세상에 칼을 겨누면서 살았는데, 선생님들은 그걸 다 죽이고 둥근 원처럼 사는 걸 추구하셨어요. 그걸 이해 못했는데 살다보니 그게 더 편하구나를 깨달았어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스스로를 다스려주게 만들었어요. 대학생활에서도 제일 큰 힘이 되셨고 어머니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가 힘들 때도 멘토가 되어 주셨어요.
[멘토, 금희씨 인생에 힘이 되는 스승이 되어 준 셋넷 학교 교장선생님. 금희씨는 셋넷학교를 통해 더 큰 세상을 보게 됐습니다. 셋넷학교에서 탈북에 대한 얘기로 만든 노래극의 주인공을 하기도 하고, 남한 대학생들과 제주도에서 자전거 여행을 하기도 하고, 몽골과 유럽을 돌아보기도 했죠. 그리고 이번엔 셋넷학교에서 엮은 책, “꽃이 펴야 봄이 온다.” 제일 첫 장에 금희씨의 글이 실렸습니다.]
최금희:
지금은 한국생활을 좀 안다고 생각이 들어서 쓴 책이라 제 마음에 있는 걸 하나하나 녹여서 썼어요.
금희의 여행 땐 고민을 많이 했는데 나를 찾아가는 게 관건이었고, 살면서 금희라는 이름 외에 탈북자, 새터민, 북한이탈주민, 도망자, 북한에선 배신자라고도 할 거에요. 그런 다양한 이름을 가진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그게 고민이었어요. 그래서 나온 제목이 ‘사랑하라. 놓지 마라. 우리는 하나다.’ 인데 호주에 공부하러 가면서 셋넷학교 교장선생님이 몇백 달러를 넣어서 주신 봉투에 적힌 글이었어요. ‘사랑하라. 놓지마라.’ 저는 주문처럼 매일 그걸 보면서 힘을 냈어요. 살다보면 놓아야 할 것도, 이상한 것도 많은데 어느 것도 놓지 말아야겠다. 사랑해야겠다. 그런 마음이면 ‘북한사람이건 남한 사람이건 탈북자건 배신자건 그걸 뛰어 넘는 사람이 되겠다. 그럴 수 있겠다.’ 라는 마음이 들어서 ‘사랑하자. 놓지 말자.’ 그런 제목을 쓰게 됐어요. [금희씨의 글은 그야말로 누군가의 일기를 읽는 것처럼 소소한 재미와 은밀한 아픔과 애잔한 감동이 뒤섞여 그 글에 쉽게 동화되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라. 놓지 마라. 우리는 하나다.’ 가운데 금희씨가 직접 고른 한 대목, 들어보시죠.]
최금희:
내가 만나는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세상을 아름답게, 사람답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좋은 학벌도, 유창한 영어 실력도 없고, 많은 돈을 벌려고 피나게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이 노력하는 것은 비뚤어진 세상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바로잡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데 아직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미워하기 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먼저 생각하고 안으려고 한다. 미워하기보다 사랑하기가 편하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사랑하기가 편해진 금희씨, 올해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가을 쯤 결혼도 합니다. 공부는 계속 더 할 생각이고요.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 금희씨, 인생에서 포기할 수 없는 게 있다면 어떤 걸까요?]
최금희:
고향. 내 고향 아오지. 참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곳이에요. 6.25 때 내려오신 분들이 고향 얘길 많이 하는데 저는 잘 몰랐어요. 저희 작은 할아버지도 계속 고향 얘길 하셨어요. 이제 그 마음을 백분의 일, 천분의 일은 이해할 거 같아요. 아오지하면 관광지, 아니면 이상한 곳으로가 아니라 제게 아오지는 고유명사가 된 그런 곳인 것 같아요.
이예진: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 거 같아요?
최금희:
고향 가서 친구들 만나는 걸 상상해요. 꾸역꾸역 울 거 같아요. 빨리 가고 싶죠. 하지만 변한 나와 변한 고향을 보고 어떻게 소통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가 걱정이에요.
[금희씨 말대로 남과 북이 함께 추억거리를 만들며 이제는 제대로 된 소통을 준비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희망통신, 이예진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