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초대석 : 브라질과 미국의 성공 이민생활, 이영희씨 부부


2007.08.28

워싱턴-박정우 parkj@rfa.org

머나먼 고국 땅을 떠나 이역만리 낯선 외국에서 생활해야 하는 이민자들의 삶. 수많은 어려움과 도전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힘든 만큼 역경을 헤치고 이뤄낸 이민자들의 성공은 더욱 값지기 마련입니다.

RFA 초대석, 오늘은 41년전 남아메리카주의 브라질로 이민길에 오른뒤 20년전 미국으로 건너온 이영희씨 부부를 만나봅니다. 이영희(67)씨 부부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두 자녀를 의사로 훌륭하게 길러냈습니다.

1966년 3월 남한 부산항에서 2만톤급 브라질 이민선 루이스호가 \x{d0d7}을 올립니다. 두려움 반, 기대 반, 낯선 브라질 땅을 향해 이민길에 오른 예순 여덟 세대의 한인들 중에 이영희씨가 있었습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스물여섯. 한국에서 군사 혁명이 한바탕 휩쓸고 간 뒤 공무원 생활에 흥미를 잃은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함께 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이영희: 그 때 5.16 나고 인제 정부 고위자리에 전부 군부가 들어오고, 아버지는 경기도청 산림과에서 계속 그 방향으로 지부장까지 하시고 했는데 군부가 들어서고는 고위자리에 군인들이 들어오니까 그때 여기가 지금 안 좋구나 이런 생각을 하신 것 같아요.

기회의 땅이라 여겼던 남미 브라질. 하지만 초기 정착과정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이영희: 초기에는 거기에 농사로 이민을 시작했는데 농경지를 가보니까 허허벌판에 사람들이 있을 곳이 못돼서 모두들 상파울로로 올라왔어요. 그래가지고 각자 자기가 방향을 잡고 사는거죠. 그때는 다 이민이 돈을 가져간 사람들이 없었고 가족들이 정말 몇백불 가지고, 차비만 해서 겨우 가가지곤 돈이 없는 상황이니까 아주 밑바닥부터 일을 했어야 했죠.

이영희씨 가족은 간신히 꽃집을 하나 인수했지만 온 가족들이 매달려야 했습니다. 장미를 다듬다 가시에 손가락을 수도 없이 찔려 밤이면 따갑고 아파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다고 이영희씨는 회상합니다.

이영희: 그게 꽃집이라는 게 새벽에 가서 꽃을 사와야 했는데 주로 남동생들이 그걸 했죠. 저나 어머니는 그 안에서 꽃을 일일이 다듬어야 했죠. 또 매일아침 화병에 물을 갈고 꽃을 꽂아두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생일, 파티 등 행사 때마다 동생들이 꽃을 배달했죠. 근데 그 당시는 그게 힘들다고 생각을 안 하고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잡았다는 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시간당 일을 하면서 살았는데 그래도 내 일을 잡고 그걸 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찍 자리를 잡은 거죠.

이영희씨는 1년 뒤 먼저 브라질에 와 있던 현재의 남편 이호영(71)씨를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공장에서 막일을 해가면서 배운 기술로 이호영씨는 머리핀을 만드는 작은 공장을 차렸습니다. 시행착오 끝에 겨우 자리를 잡게 될 때쯤 시련이 닥칩니다. 공장이 홍수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이영희: 어떻게 공장이라는 곳은 보통 싼 곳을 보게 되죠. 저희가 얕은 지대의 물같은 것은 생각을 안 했죠. 공장이 좀 넓고 싸니까 거기서 시작했던 게, 잘 또 물건도 나가고 할 때 어느 날 거기가 십 몇 년만에 장마였대요. 갑자기 폭우로 동네가 다 잠긴거죠. 공장 시작한지 한 이삼년, 겨우 자리가 잡히려고 할 때쯤 그런 사고가 났죠.

이영희씨는 이후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미싱, 즉 재봉틀로 수를 놓았고 남편 이호영씨는 이후에도 몇 차례의 어려움이 닥치긴 했지만 그럭저럭 작은 공장을 운영해 나갔습니다.

부부는 아들, 딸, 이란성 쌍둥이인 아이들이 커가면서 미국으로 다시 이민을 떠날 결심을 합니다. 더 나은 환경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섭니다.

이영희: 아이들이 그때 한 아홉 살, 열 살 돼오니까 아이들 장래도 생각하고 하니까 그때부터 다시 미국을 생각하게 됐죠. 브라질에선 아무래도 아이들을 그냥 머물게 하기에는 좀 그렇다 생각을 했어요. 포르투갈어가 브라질 하고 포르투갈에서만 쓰니까 그게 좁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영어를 좀 시켜서. 그런 점도 있고 한국 아이들이 머리들은 좋으니까 좋은 대학을 가서는 졸업을 하고는 자기 전공분야에서 성공을 못해요. 다시 부모들이 하는 제품동네로 들어와서는 장사로 돌아가지 전공분야로 성공을 못해요. 그걸 보니까 아무래도 묻어 두고 싶질 않아요.

아이들 교육을 위해 20년간 살던 브라질을 아무 미련 없이 버리고 미국으로 온 이영희씨 부부는 동전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또다시 힘겨운 이민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데다 새벽 6시부터 밤 8시까지 휴일도 없이 하루도 쉬지 않고 부부가 세탁소 일에 매달려야 했지만 아이들의 말동무가 돼 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호영, 이영희: 뭐 어려운 점은 많았지만 결국은 이날 이때까지 지나온 건 아이들하고의 관계가 제일 중요한데요 저희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아이들하고 항상 대화가 계속됐다는 것 그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때 중고등학교 다닐때 학교 갔다 오면 즉시 연락을 해가지고 매일같이 대화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리고 저희 아이들은 브라질에서부터 어릴 때부터 저희가 한국어를 가르쳤어요. 한국어를 가르쳐야만 우리하고 통하지, 브라질 말을 세밀하게 할 수도 없고 미국에 와서 영어로도 세밀하게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꼭 한국어를 잘하게 가르쳤어요.

그래서 둘 다 한국에서 자라난 아이들하고 별 차이 없이 한국말을 잘 해요. 다 쓰고 보고 말하고. 그것이 결국은 아이들하고 대화가 중요시 됐기 때문에 가능했고 지금 뭐 대학가서 수십년 흘렀는데도 매일같이 하루에 한 두번은 꼭 전화를 해요. 그러니까 이 한국어 회화가 계속돼요. 후손 잘되는 것이 성공이지 딴 거 뭐 있겠어요. 그런데 아이들을 잘 기른다는 것은 역시 아이들하고 간격 없이 대화가 많을 때 아이들이 탈선 안하고 제대로 갈 수 있다는 것, 그건 꼭 필요한 걸로 알고 있어요.

자신들과 마음 터놓고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자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정성 탓인지 이영희씨 아들, 딸은 현재 미국에서 의사로 성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힘들었지만 이민생활 내내 아이들이 무럭무럭 잘 커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무척 가슴 뿌듯했다는 이들 노부부. 자식들 얘기가 나오자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이영희: 아들은 주로 장학금으로 돼 있었고 딸만 웨슬리 다니니까 학비가 조금 들어갔고, 그런데 아들은 또 졸업하고 나니까 대학원 가고 또 교수가 박사학위 해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박사학위 했는데 박사 과정 5년 동안 생활비까지 주고 학비도 다 대준대요. 너는 연구만 해라. 그걸 받으면서 바로 또 의과대학에 가고 싶다고 해서. 그러니까 아주 성실하게 공부만 했던것 같아요. 저희들이 열심히 하니까 저희들한테 보답은 자기들이 공부 열심히 하는 것으로 보답하겠다고 생각했나 봐요.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손주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이영희씨 부부. 누구나 자기 능력을 펼칠 수 있는 미국이 가져다준 기회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습니다.

이영희: 자기가 실력발휘 하는 데는 역시 미국이 그래서 기회의 땅이라고 하는 것 같아요. 열심히 하면 경제적으로 거기에 대한 대가가 오니까. 그리고 여기 얼마나 좋아요, 인권 존중해 주고. 법이 있기 때문에 꼭 법의 틀 안에서 잘하기만 하면 별고 없이.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입니다.

이영희: 그리고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걸로 아는데 우선 가정의 화목이 첫짼 것 같아요. 부부가 화목하지 않은 가정들이 아이들도 삐둘어지고 부모가 이혼한 가정들이 탈선한 경우도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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