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직업, 나의 미래] 전자회사 기술자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0.04.20
2010.04.20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안녕하세요 ‘나의 직업, 나의 미래’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사람이 편하게 사는 쪽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영상으로 대화하는 손전화기가 나오고, 호주머니에 넣을 만큼 작은 기계로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한 다양한 전자제품도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전자제품이 나오면서 각기 다른 전자제품을 연결해 주는 연결 기기 장치도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남한에서 이러한 전자제품 연결 부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기술직 사무여성의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함경남도 출신의 탈북여성 유혜인( 가명 ) 씨는 남한 생활을 시작하자 마자 6개월 만에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유 씨의 자기소개 부터 들어봅니다.
유혜인: 저는 서울에 있는 모 전자회사에서 회사원으로 일하고 입사한 지 5년이 넘었습니다.
북한에서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고향이 어딘지 또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자기소개를 들어서는 도대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현재 40대 중반인 유 씨는 북한에서는 물리학을 공부한 인텔리로 탈북을 오랫동안 계획했던 것이 아니라 운명의 장난처럼 중국에 출장을 갔다가 그 길로 남한에 가게 됐다고만 말했습니다.
유혜인: 저희가 북한에서 한국에 올 때 단지 배고품 하나 때문에 넘어온 것은 아니고 그 이유도 다양합니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한국으로 올 때는 스스로 왔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면 스스로 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통일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살아있는동안 통일이 된다면 북한으로 가서 뭔가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유 씨가 다니는 직장은 사장을 포함해 직원이 10명이 안 되는 소규모 전자부품 생산업체입니다. 하지만 연간 매출 규모는 14억 원에서 16억 원, 미국 돈으로 하면 약 150만 달러가 됩니다. 유 씨가 하는 일은 북한에서 전선 까벨이라고 하는 전기 케이블과 관련이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가정에서 쓰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의 연결선 부터 시작해서 큰 공장에 쓰는 수만 달러가 되는 기계 부속 연결 장치까지 각종 전자제품 연결선 관련 제품을 만들면서 판매 일도 합니다.
유혜인: 개발 업무에도 참여 해야 하고 새로운 제품이 소개되면 그것을 응용해서 다른 업체에 활용할 수 있는 정보제공도 해야 합니다. 저희는 거의 1인 4역을 해야 합니다.
남한 생활 시작하고 처음 2년은 20년처럼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고 말하는 유 씨. 너무 힘드니까 빨리 시간이 갔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는 일이나 현재 삶에서 자신감을 갖고 생활하기 때문에 시간을 쪼개 자기 계발을 하면서 보람있게 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현재 생활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다른 사람의 기준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들의 순위를 만들어 10개 중에 3개 정도만 가지면 행복하다고 말할 정도가 됐습니다. 보통 남한 사람도 어렵다는 취업의 문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취업 준비를 착실히 했던 탓에 큰 어려움 없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유혜인: 처음에 하나원을 나와서 낮에는 컴퓨터 학원에 다니고 밤에는 정보통신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제가 야간 대학을 간 이유는 영어를 활용할 수 있는 이런 분야를 찾다 보니까 야간 대학을 간 겁니다. 일반 영어 학원을 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려면 기초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럴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그땐 없었죠. 혼자니까 내가 일해야 하는데 학원에 다니면서 생활할 수 없어서 저녁에 야간 대학에 가서 컴퓨터를 배우면서 영어 공부를 한 겁니다.
북한에선 영어가 아닌 러시아 어를 배웠기 때문에 남한에서 사용하는 산업 용어들을 이해하기 까지 1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많이 듣고, 쓰고 하는 것이라며 첫 번째 언어에서 오는 시련은 일하면서 자연히 극복했지만 두 번째 그를 찾은 고민은 유 씨 마음의 문제로 쉽게 해답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 데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열심히 일하면서도 유 씨는 자신감을 잃게 됐습니다. 날이 갈수록 소심해 지고 자꾸만 움츠러드는 자신이 싫었지만 북한식 말투는 쉽게 고칠 수가 없었고 아무리 남한사람 행세를 해도 탈북자는 아니어도 조선족쯤으로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결국 회사생활 1년 6개월이 지나면서 유 씨는 자신의 마음을 직장 동료에게 털어놓게 됩니다. 언제든 회사가 필요 없다고 하면서 나가라고 하면 그만둘거야 라고 맘 먹었고 있었는데 그런 유 씨의 마음은 상사의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로 흐린 날 먹구름이 거치듯 사라집니다.
유혜인: 그런데 시련이 왔을 때 사장님이 저에게 북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아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것이 판매로 연결될 수 있으니 탈북자이기 때문에 안 될 것이란 생각은 버리라고 했습니다. 직장 상사가 그런 말을 해서 한 번 해보자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직장 상사와 동료의 관심이라는 외부 요인과 함께 유 씨의 마음을 편하게 만든 것은 자신의 실력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정받고 잘살려면 출신성분이나 토대가 아닌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 씨는 몸으로 체험하면서 비로소 남한생활에 뿌릴 내릴 수 있었습니다.
유혜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전기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많은 사장님이 와서 주문 하고 하지만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전기, 전압, 전류, 저항에 대해 많이 알고 오시는 분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싼 기계에 들어가는 부품일수록 정확한 자료가 필요합니다. 얘기를 듣고 제가 건의해준 대로 만들어 가서 성능이 좋고 제품이 잘 나오니까 그다음부터 그분들이 저의 말을 회사에 잘해줘서 자신감이 생긴 겁니다.
자심감을 되찾은 유 씨는 시간이 지나면서 직급도 올라가고 월급도 함께 많아졌습니다. 출근은 아침 9시 퇴근은 저녁 7시 그리고 점심 시간은 1시간.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회사생활입니다. 처음 입사해서는 110만 원 미국 돈으로 하면 한 달에 1천 달러를 받았지만 지금은 연봉으로 2천3백만원 그러니까 1년 총 수입이 2만 달러가 넘습니다. 직장인으로 생활의 안정을 찾은 유 씨의 남한 생활도 안정 궤도에 올랐습니다. 그가 느끼는 남한에서의 직장은 어떤 의미이고 앞으로의 소망은 무엇인지도 들어봤습니다.
유혜인: 회사가 내 존재 이유를 알려주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나 경제적 수입 원천이 되는 곳을 떠나 내가 살아 있는 사람임을 알게 해줘서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내가 행복해지려면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해줄 수 있을 때 진정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순수 삶에 대해서만 얘기한다면 5년 안으로 서로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싶습니다.
진실하게 행복하다는 것은 사람들과 어울려서 나누며 양보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북한에서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헌신할 곳이 있다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라는 철학을 가졌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남한에 가서는 기본은 같지만 누구를 위해 헌신하고 행복해 져야 하는 지 바뀌었다고 유 씨는 말했습니다.
‘나의 직업, 나의 미래’ 오늘은 전기전자제품 생산 회사에서 일하는 탈북여성 유혜인(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사람이 편하게 사는 쪽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영상으로 대화하는 손전화기가 나오고, 호주머니에 넣을 만큼 작은 기계로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한 다양한 전자제품도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전자제품이 나오면서 각기 다른 전자제품을 연결해 주는 연결 기기 장치도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남한에서 이러한 전자제품 연결 부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기술직 사무여성의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함경남도 출신의 탈북여성 유혜인( 가명 ) 씨는 남한 생활을 시작하자 마자 6개월 만에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유 씨의 자기소개 부터 들어봅니다.
유혜인: 저는 서울에 있는 모 전자회사에서 회사원으로 일하고 입사한 지 5년이 넘었습니다.
북한에서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고향이 어딘지 또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자기소개를 들어서는 도대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현재 40대 중반인 유 씨는 북한에서는 물리학을 공부한 인텔리로 탈북을 오랫동안 계획했던 것이 아니라 운명의 장난처럼 중국에 출장을 갔다가 그 길로 남한에 가게 됐다고만 말했습니다.
유혜인: 저희가 북한에서 한국에 올 때 단지 배고품 하나 때문에 넘어온 것은 아니고 그 이유도 다양합니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한국으로 올 때는 스스로 왔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면 스스로 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통일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살아있는동안 통일이 된다면 북한으로 가서 뭔가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유 씨가 다니는 직장은 사장을 포함해 직원이 10명이 안 되는 소규모 전자부품 생산업체입니다. 하지만 연간 매출 규모는 14억 원에서 16억 원, 미국 돈으로 하면 약 150만 달러가 됩니다. 유 씨가 하는 일은 북한에서 전선 까벨이라고 하는 전기 케이블과 관련이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가정에서 쓰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의 연결선 부터 시작해서 큰 공장에 쓰는 수만 달러가 되는 기계 부속 연결 장치까지 각종 전자제품 연결선 관련 제품을 만들면서 판매 일도 합니다.
유혜인: 개발 업무에도 참여 해야 하고 새로운 제품이 소개되면 그것을 응용해서 다른 업체에 활용할 수 있는 정보제공도 해야 합니다. 저희는 거의 1인 4역을 해야 합니다.
남한 생활 시작하고 처음 2년은 20년처럼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고 말하는 유 씨. 너무 힘드니까 빨리 시간이 갔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는 일이나 현재 삶에서 자신감을 갖고 생활하기 때문에 시간을 쪼개 자기 계발을 하면서 보람있게 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현재 생활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다른 사람의 기준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들의 순위를 만들어 10개 중에 3개 정도만 가지면 행복하다고 말할 정도가 됐습니다. 보통 남한 사람도 어렵다는 취업의 문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취업 준비를 착실히 했던 탓에 큰 어려움 없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유혜인: 처음에 하나원을 나와서 낮에는 컴퓨터 학원에 다니고 밤에는 정보통신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제가 야간 대학을 간 이유는 영어를 활용할 수 있는 이런 분야를 찾다 보니까 야간 대학을 간 겁니다. 일반 영어 학원을 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려면 기초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럴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그땐 없었죠. 혼자니까 내가 일해야 하는데 학원에 다니면서 생활할 수 없어서 저녁에 야간 대학에 가서 컴퓨터를 배우면서 영어 공부를 한 겁니다.
북한에선 영어가 아닌 러시아 어를 배웠기 때문에 남한에서 사용하는 산업 용어들을 이해하기 까지 1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많이 듣고, 쓰고 하는 것이라며 첫 번째 언어에서 오는 시련은 일하면서 자연히 극복했지만 두 번째 그를 찾은 고민은 유 씨 마음의 문제로 쉽게 해답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 데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열심히 일하면서도 유 씨는 자신감을 잃게 됐습니다. 날이 갈수록 소심해 지고 자꾸만 움츠러드는 자신이 싫었지만 북한식 말투는 쉽게 고칠 수가 없었고 아무리 남한사람 행세를 해도 탈북자는 아니어도 조선족쯤으로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결국 회사생활 1년 6개월이 지나면서 유 씨는 자신의 마음을 직장 동료에게 털어놓게 됩니다. 언제든 회사가 필요 없다고 하면서 나가라고 하면 그만둘거야 라고 맘 먹었고 있었는데 그런 유 씨의 마음은 상사의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로 흐린 날 먹구름이 거치듯 사라집니다.
유혜인: 그런데 시련이 왔을 때 사장님이 저에게 북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아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것이 판매로 연결될 수 있으니 탈북자이기 때문에 안 될 것이란 생각은 버리라고 했습니다. 직장 상사가 그런 말을 해서 한 번 해보자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직장 상사와 동료의 관심이라는 외부 요인과 함께 유 씨의 마음을 편하게 만든 것은 자신의 실력이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정받고 잘살려면 출신성분이나 토대가 아닌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 씨는 몸으로 체험하면서 비로소 남한생활에 뿌릴 내릴 수 있었습니다.
유혜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전기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많은 사장님이 와서 주문 하고 하지만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전기, 전압, 전류, 저항에 대해 많이 알고 오시는 분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싼 기계에 들어가는 부품일수록 정확한 자료가 필요합니다. 얘기를 듣고 제가 건의해준 대로 만들어 가서 성능이 좋고 제품이 잘 나오니까 그다음부터 그분들이 저의 말을 회사에 잘해줘서 자신감이 생긴 겁니다.
자심감을 되찾은 유 씨는 시간이 지나면서 직급도 올라가고 월급도 함께 많아졌습니다. 출근은 아침 9시 퇴근은 저녁 7시 그리고 점심 시간은 1시간.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회사생활입니다. 처음 입사해서는 110만 원 미국 돈으로 하면 한 달에 1천 달러를 받았지만 지금은 연봉으로 2천3백만원 그러니까 1년 총 수입이 2만 달러가 넘습니다. 직장인으로 생활의 안정을 찾은 유 씨의 남한 생활도 안정 궤도에 올랐습니다. 그가 느끼는 남한에서의 직장은 어떤 의미이고 앞으로의 소망은 무엇인지도 들어봤습니다.
유혜인: 회사가 내 존재 이유를 알려주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나 경제적 수입 원천이 되는 곳을 떠나 내가 살아 있는 사람임을 알게 해줘서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내가 행복해지려면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해줄 수 있을 때 진정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순수 삶에 대해서만 얘기한다면 5년 안으로 서로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싶습니다.
진실하게 행복하다는 것은 사람들과 어울려서 나누며 양보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북한에서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헌신할 곳이 있다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라는 철학을 가졌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남한에 가서는 기본은 같지만 누구를 위해 헌신하고 행복해 져야 하는 지 바뀌었다고 유 씨는 말했습니다.
‘나의 직업, 나의 미래’ 오늘은 전기전자제품 생산 회사에서 일하는 탈북여성 유혜인(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