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독립유공자 인정 논쟁을 보며

주성하-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9-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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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 박차정(왼쪽)과 의열단장 김원봉의 결혼사진
의열단원 박차정(왼쪽)과 의열단장 김원봉의 결혼사진
사진 - 연합뉴스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즘 남쪽에선 약산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가 안하는 가를 놓고 시끄럽습니다. 김원봉은 1948년에 월북해 북에서 최초의 국가검열상을 지냈고, 전쟁 때는 노동상을 했고, 1957년에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돼 어떻게 사망했는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일단 남쪽의 독립유공자에 대해 말씀드리면, 해방 전에 일제와 싸웠던 분들을 말하는데 북한으로 치면 항일투사나 항일애국열사 이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다만 북에서는 그 후손들이 간부 승진에 큰 도움이 되는 것에 비해, 한국은 자손들에 대한 혜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냥 보상금이나 연금을 좀 주고 기타 이러저런 혜택이 있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고, 그냥 독립유공자가 있으면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다 이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북한과 한국의 항일 또는 독립 유공자 선정 기준은 제가 봤을 때는 모두 문제들이 많습니다. 물론 북한이 훨씬 더 심한데, 김일성 빨치산 계열이 아니면 다 무시되니, 해방 전에 항일을 했던 사람들의 10%도 인정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김일성만이 항일 열심히 한 것처럼 만들다보니 김일성보다 더 대단한 항일투사들은 다 매장시킨 것이죠.

한국은 북한보다는 훨씬 인정 기준이 넓지만 대신 상해 임정은 그냥 따라만 다녀도 독립 유공자로 인정해 주었지만, 사회주의 계열에서 항일하다 희생된 사람들은 거의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해방 전 항일전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졌던 만주에서 빨치산을 하다 희생된 사람들이 전체 항일 열사의 절반 이상이 되는데, 이들은 남쪽에서도 잊혀진 것이죠. 또 김일성 정권 수립에 기여한 사람들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가끔 안 될 것 같은데, 인정되는 경우도 있는데, 김일성 삼촌 김형권과 외삼촌 강진석은 해방 전에 민족주의 계열에서 싸우다 희생됐기 때문에 이건 또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도 3년 전에 논란이 됐지만, 아직 박탈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올해는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냐 마냐를 놓고 논쟁이 시작됐는데, 그가 김일성 정권에서 고위 직책에 있었던 사람이란 점에서 현재의 독립유공자 인정 기준으로는 맞지 않는 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주 유명한 항일 투사였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김원봉이 누군지에 대해선 북에서도 절대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는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에 다녔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의열단을 창설합니다.

이 의열단은 국내에서 일제의 아성인 조선총독부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고, 일본까지 건너가 왕궁에 폭탄 투척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대장인 김원봉은 1926년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고, 1927년엔 황포군관학교 교관 신분으로 중국 공산당 주도의 광저우 봉기에도 참가했습니다. 1926년~27년에 황포군관학교에는 150명이 넘는 한국인 청년들이 교육을 받았는데, 아쉽게도 1927년 광주봉기에 참가했다가 최용건이나 김원봉, 오성륜 정도의 몇 명만 살아남고 대다수가 전사했습니다. 나중에 살아있으면 모두 쟁쟁한 혁명가들이 됐을 건데,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김원봉은 이후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 있었고, 1935년에는 민족혁명당을 만들었으며 1938년 조선의용대를 결성해 사령관으로 있었습니다. 이후에 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 군무부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김원봉의 활약은 긴말이 필요없고, 일제가 그의 목에 건 현상금 액수를 보고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걸린 현상금은 100만 원이었는데, 남쪽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에게 걸린 현상금이 60만 원이었던 것을 보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김일성에게 건 현상금은 1만 원이었으니 일제가 김원봉의 몸값을 김일성보다 100배 더 높이 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100만 원은 지금 화폐로 환산하면 3000만 달러 정도 된답니다. 일제가 김원봉에게 건 현상금 액수는 미국이 2005년에 알 카에다 오사마 빈 라덴에게 현상금 5000만 달러를 내걸기 전까진 세계 역사상 최고액 현상금이라고 하니, 김원봉은 이처럼 대단한 항일투사였습니다.

그는 해방 후에 서울로 귀국했는데, 이후에 남쪽에선 기가 막힌 일들이 적지 않게 벌어졌죠. 이승만이 일제 경찰들을 대거 요직에 기용한 것도 대표적 사례인데, 당시 이승만의 처지에서 보면 당장 북에서 공산당이 내려오려 하고, 남쪽에서도 이에 보조를 맞춘 공산당이 활개를 치니 이를 막자면 불가피한 점도 물론 있습니다. 당장 정권을 지키자니 어쩔 수 없이 일제 경찰 출신들인 유능한 수사관들을 활용해 공산당을 잡은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친일파 경찰들을 등용한 것은 지금도 대다수 남쪽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대목입니다.

아무튼 이중에는 유명한 악질 일제 고문경찰이었던 노덕술이란 인물이 있는데, 이자가 1947년 김원봉을 체포해 고문합니다. 노덕술은 워낙 악랄해서 김원봉의 의열단 암살 대상이었는데, 해방된 땅에서 오히려 이런 놈에게 체포되니 김원봉은 눈이 뒤집힌 것이죠. 그래서 결국 김일성도, 공산당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북으로 갔고, 한 10년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뒤 결국 숙청돼 결국 남이나 북에서나 잊혀졌습니다. 그렇게 묻혔던 김원봉을 놓고 요새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논쟁이 시작된 것을 보면 남쪽도 이제는 많이 관대해지는 사회가 되어간다는 증거라 볼 수 있습니다. 어차피 혈통만 따지는 북한 세습 정권이 인정해주기는 그른 모양이고, 남쪽에서라도 이제라도 더 많은 독립유공자들이 이런 논쟁을 거쳐 너그럽게 인정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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