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에 내려오겠다는 김정은

주성하-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8-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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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6일 만찬이 끝난 뒤 북측이 마련한 차량에 탑승한 특사단을 배웅하는 장면. 왼쪽부터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 김정은 당 위원장,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
사진은 6일 만찬이 끝난 뒤 북측이 마련한 차량에 탑승한 특사단을 배웅하는 장면. 왼쪽부터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 김정은 당 위원장,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북한에서 지난달 김영남, 이설주, 김영철 이런 고위급들을 한국에 내려 보낸 것에 화답해 남쪽은 5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을 북에 보냈습니다. 놀랍게도 남쪽 특사단은 평양 도착 3시간 만에 김정은과 만났습니다. 김정은의 조급함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김정은과의 면담시간은 1시간 정도 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무려 4시간이나 이어졌습니다.

김정은이 남측 사람은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이설주까지 데리고 나왔습니다. 굳이 데리고 나오지 않아도 되는데 말입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엔 자기를 무시하고 아예 상대를 해주지 않았는데, 이젠 드디어 남쪽에서 자기를 인정해주고, 정상회담까지 하겠다고 하니 이제야 비로써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김정은이 남쪽에 약속한 것들은 더욱 놀랍습니다. 우선 김정은이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4월에 서울까진 아니지만, 남쪽 판문점 평화의 집까지 와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합니다. 평화의 집은 군사분계선 남쪽 250m 지점에 있는 건물인데, 북한쪽 판문각과 마주하고 있는 건물이 자유의 집이고 그 옆에 회담용 건물 하나 세운 것이 평화의 집입니다.

6.25전쟁이 끝난 이후에 김일성도, 김정일도 남쪽에 온 적이 없는데, 김 씨 일가 중에선 김정은이 제일 먼저 오는 셈입니다. 비록 250m만 내려오긴 해도 어쨌든 김정은의 용기에 남쪽 사람들도 놀랐습니다. 이게 진짜 용감하고, 대담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급해 맞아서 온다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제 보기엔 과시를 위한 의도가 큰 것 같습니다.

아마 남쪽 특사단이 남북정상회담을 어디에서 할지 여러 방안을 준비해 갔을 겁니다. 그중에는 제주도도 있었을 것이고, 서울도 있었을 것이고,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가는 방안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긴 실리를 중시하니 아마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에서 회담을 하자고 해도 갔을 겁니다. 그런데 김정은이 그 여러 안 중에서 자기가 남쪽에 오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서울까지는 아직 겁이 나고, 평화의 집 정도면 유엔 사령부 관할 하에 있고, 일반인 접근이 불가능하니 여긴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겠죠.

그리고 이번에 김정은은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말도 했습니다. 물론 이건 과거 북한이 자주 했던 것이긴 하지만, 2012년 4월에 헌법에 핵보유국이라고 명시한 이후엔 꺼내지 않던 말입니다. 그런데 다시 꺼내든 것입니다. 인민들을 향해선 죽어도 핵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고선, 미국이 김정은 제거까지 염두에 두고 압박하자 몰래 손을 든 셈입니다.

물론 북한이 말하는 체제안전은 아마 북미 간에 평화협정과 대사급 외교관계가 맺어지고, 미군이 철수하는 정도를 의미할 거라 봅니다. 그게 이뤄지면 아마 이렇게 선전하겠죠. “미국이 잘못했다고 사죄하고 우리를 절대 치지 않겠다고 하니 우리가 너그럽게 그 사과를 받아들이고 핵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런 논리를 아마 펼 것 같습니다.

또 김정은은 특사단에 미국과 비핵화를 놓고 대화를 하겠다고 했고, 대화 기간에는 추가 핵실험 및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등 전략도발을 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재래식 무기를 남쪽을 향해 사용하지도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 사이에 전화선도 놓겠다고 했습니다.

김정은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서 저는 북한이 아무리 세상을 향해 큰 소리를 쳐도 결국 힘으로 몰아붙이면 굴복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대표적으로 1976년 8월에 판문점 도끼사건 때에도 미국이 전쟁을 불사할 각오로 응징 작전에 나서니 김일성은 재빨리 자신들의 도발에 대해 사과 성명을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도 김정은이 저렇게 나온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보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트럼프는 최근에도 사실상 자기가 쓸 수 있는 마지막 대북 제재 카드를 꺼내들면서 이게 통하지 않으면 전쟁까지 하겠다고 암시했습니다. 실제 미국의 고위급 정보통들의 말을 들으면 트럼프는 진짜로 전쟁을 할 생각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짜 훨씬 더 무서운 게 뭐냐면 트럼프 행정부 들어서서 처음으로 중국하고 김정은 제거 이후 한반도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를 논의했다고 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김정은 이후 북한을 어떻게 할까를 논의했다면 이건 정말 엄청 무서운 일입니다. 지금까지 중국이 북한의 붕괴를 절대 용인 못한다는 입장을 보여서 미국이 북한을 치지 못했던 것이죠. 그런데 지금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두 강대국이 김정은 제거를 논의했다는 것은 이게 더 이상 엄포나 협박이 아닌, 실행 가능한 일이란 것을 의미합니다. 솔직히 미사일 한 방이면 김정은 제거하는 건 일도 아닙니다.

그걸 보면서 김정은은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북한은 딱 한 가지, 김정은을 위해 존재합니다. 김정은이 죽으면 모든 게 의미가 없는 것이죠.

결국 김정은은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일단 나와서 진짜 행동할지, 아니면 하는 척 할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결국 이것도 미국이 얼마나 더 몰아세우냐에 달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정은이 저렇게 나오니까 트럼프도 “그래 원한다면 한번 만나는 보자”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또 말로만 약속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우리는 이번엔 가만있지 않겠다. 우린 과거 정부처럼 북한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완강한 입장입니다. 김정은은 과거 김정일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과 외교란 이름으로 장난질치기도 어렵게 됐습니다. 상대가 바로 트럼프이기 때문이죠.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때가 몇 달 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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