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농에게 재가한 ‘혁명의 어머니’

주성하-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7.03.10
kangbansuk_statue-620.jpg 만경대 묘지의 김일성의 생모 강반석 동상.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일성 회고록이 말해주지 않는 김일성 항일운동의 진실 오늘은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여러분들은 김일성의 모친인 강반석을 위대한 혁명의 어머니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사실 1920년대 후반의 강반석은 그냥 평범한 아낙에 불과했죠.

1926년 김형직이 병으로 죽자 남은 가족의 생계가 강반석의 어깨에 걸렸습니다. 아들은 셋인데, 김성주는 밖에 나가 돌아다니고, 둘째 철주와 셋째 영주는 너무 어렸습니다. 여기에 평양에서 시어머니 이보익까지 김형직 간호를 위해 안도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당시는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던 시절인데, 여자들끼리 한계가 있고, 나중에 강반석의 몸까지 아파서 더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강반석은 소사하 인근 만보라는 중국인 동네에 사는 유일한 조선인인 조광준이란 부농과 재혼합니다. 아이 둘은 이보익이 데리고 키웠습니다. 강반석이 재혼했었다는 이야기는 아마 다들 처음 들을 겁니다.

하지만 안도 만보에 가면 거기 노인들은 강반석을 잘 알고 있습니다. 조광준이란 사람은 그냥 무우밥에 시래깃국이나 먹고 사는 정도였는데, 자기 땅도 조금 있었지만 중국인 땅도 소작 맡아서 악착같이 일했습니다. 워낙 부지런하다보니 해방이 되던 1945년 갑자기 살림이 펴서 땅을 많이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해방이 되면서 조광준은 지주로 몰려 맞아죽었고, 이를 목격한 사람도 많습니다.

조광준은 본처가 병으로 죽는 바람에 강반석과 재혼했습니다. 하지만 둘은 반 년 정도 살고 다시 헤어졌습니다. 강반석이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신은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면서 조광준을 설득해 1930년 초에 다시 시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조광준에겐 본처 아들이 있었는데, 해방 전까지 만보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맞아죽은 뒤 송강 어디로 이사 간 뒤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조광준의 아들도 늙어 죽었을 것이고, 손자는 중국 어디에 살고 있을 건데, 자기 아버지를 강반석이란 훗어머니가 들어와 키웠다는 것을 증언해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강반석을 헐뜯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어쨌든 혁명을 하다 숨진 남편을 두었고, 또 자식들도 둘이나 독립운동에 바쳤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생활고에 힘들어하던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누구를 우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있는 그대로, 사실을 이야기하는 세상이길 원합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엔 길림 육문중학교 때 만났던 스승 상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집에서 홍루몽, 아큐정전 등 많은 책을 읽었다고 회상했죠.

상월은 1950년대 중국인민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했는데 그만 모택동이 추켜세우던 작가 곽말약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사상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중국 인민일보에 상월에 대한 비판 특집이 실릴 정도였죠. 그때 중국 공안부 정치부에서 상월을 조사했는데, 마침 담당국장이 김일성에게 군사지식을 배워준 스승이었습니다. 이 국장이 상월의 자료를 보다가 “혹시 1927년에 길림 육문중학교에서 김일성을 만났냐”라고 물었습니다. 상월은 김일성이란 이름을 처음 듣죠. 그러다가 나중에 제자 김성주가 북한의 김일성이란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상월은 중국의 반우파 투쟁 때 얻어맞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아내까지 핍박에 못 이겨 자살을 시도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가 이웃 북한 지도자가 됐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나와 소년 시절의 김일성 원수와의 역사적 관계’라는 회고록도 하나 쓰고, 김일성에게 자기를 도와달라고 편지도 많이 썼습니다. 하지만 회답을 한번도 못 받았습니다.

상월은 1980년경 죽었는데, 김일성은 1992년 회고록을 내면서 갑자기 그를 엄청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가 죽은 다음에야 띄워주었을까요. 자신의 과거를 잘 아는 사람들과 교류하다간 자신의 혁명역사가 조작인 게 탄로날까봐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까 상월을 조사했다던 정치보위국 국장은 유한흥이란 중국인이었습니다. 김일성보다 두 살이 더 많은 유한흥은 정규 군사학교를 나왔고,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이 조직될 때 2군 참모장이 됐는데, 그때 김일성은 대대 정치위원이었습니다.

김일성은 1932년 12월 주보중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군사지식을 배워본 적도 없으니 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래서 주보중이 당시 길림자위군 2여단 3연대장이던 유한흥을 소개시켜주었습니다.

유한흥이 몇 년 동안 김일성을 데리고 다니면서 잘 가르쳐준 덕분에 김일성의 군사지식이 많이 늘었죠. 나중에 유한흥은 연안으로 가서 모택동의 최측근 경호관이 됐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뒤 공안부 제1부부장과 정치보위국 국장을 겸직했습니다.

1950년대 중반인가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했는데, 그때 모택동이 유한흥을 불렀습니다. “이봐, 유 국장, 자네 김일성에게 군사를 배워주었다면서. 이번에 회포를 나누어보게” 이랬죠. 그래서 유한흥이 기쁜 마음으로 김일성을 영접하려 나갔는데, 김일성이 그를 보고 얼굴을 획 돌리더랍니다. 떠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아 유한흥은 무안을 당했다고 합니다. 회고록에도 유한흥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 생각이지만 자기를 ‘백전백승의 강철의 영장’이라고 잔뜩 선전했는데 중국의 일개 보위국 국장을 아는 척했다가, 나중에 그가 “저 북조선 김일성은 내가 군사를 가르쳐준 사람”이라고 말하면 체면이 서지 않을까봐 그런 거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김일성은 자기가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언할 스승들은 철저히 생전에 무시했습니다. 그런데도 북한은 김일성을 의리의 화신처럼 선전하고 있으니 참 어이가 없는 일이죠.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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