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국 16년 만에 돌아보는 서울 정착기

주성하-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8-03-30
이메일
댓글
Share
인쇄
사진은 동아일보 종로 미디어센터 사옥.
사진은 동아일보 종로 미디어센터 사옥.
Photo courtesy of 95016maphack/Wikipedia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가 10년 가까이 이 방송을 통해 여러분들과 만나고 있는데, 지금까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많이 했는데 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웬일인지 제가 살아왔던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네요. 제 방송 제목이 ‘주성하의 서울 살이’인데, 정작 청취자 여러분들은 제가 서울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모르실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동아일보 기자로 있습니다. 이 방송은 북한 인민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제가 본업 외에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고, 제 주업무는 신문기자입니다. 저는 2002년에 한국에 와서 4개월 뒤부터 기자가 됐고, 2003년에 동아일보에 입사해 15년째 다양한 북한 관련 기사를 써왔습니다.

제가 쓴 기사들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서 볼 수 있고, 해외에 나와 있는 북한 외교관이나 무역일꾼들도 많이 봅니다. 태영호 주영 북한 대사관 공사도 한국에 와서 한 첫 기자회견에서 “영국에서 두 아들과 함께 빠짐없이 주성하 기자의 글을 읽었고, 탈북을 결심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얼마 전에 제 지인이 해외에서 북쪽 높은 간부를 만났는데, 그가 “그 주성하 기자가 김일성대 어느 학부를 졸업했냐”고 물어보더랍니다. 아마 그 사람도 열심히 제 글을 읽나 봅니다.

저는 김일성대 외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에 와서 16년이 된 지금까지 제가 외문학부 졸업생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 방송을 통해 제가 처음 졸업한 학부를 밝혔으니 “주성하가 무슨 학부 나왔냐”고 궁금했던 남쪽 사람들에게도 대답이 될 듯 싶습니다. 제가 김대 졸업장까지 한국에 갖고 왔지만, 학부를 밝히지 않은 이유는 혹시나 동창들이 피해를 볼지 몰라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북에서도 제가 누군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이젠 감출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아시겠지만, 외문학부는 대외 업무를 담당하는 간부를 양성하는 곳이고, 실제로 졸업하면 외국에 나갈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김대에서도 선호도가 매우 높은 학부죠. 북한 외교관의 아마 70% 정도는 제 선후배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2002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제겐 다양한 직업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탈북할 때 한국에 가면 서울대에 가서 석사를 따고, 미국 하버드대 가서 박사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7,500만 우리 민족 중에 남과 북의 최고 대학을 나오고 세계에서 최고로 쳐주는 대학까지 나온 첫 사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오니, 지금은 안 그렇지만 당시는 탈북자를 서울대에 입학시켜주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험 쳐서 들어가야 하는데, 워낙 남과 북의 교육체계가 달라서 제가 시험 쳐서 들어갈 자신이 없었죠. 반대로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암만 서울대 나왔다 해도 북한 가서 김일성대 입학시험 통과하겠습니까. 전문학교 시험도 통과할지 모르죠.

그래서 제가 오기가 생겼습니다. 안받아주면 내가 한번 1호로 문을 열어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방법을 고민했죠. 그리고 망명해 그때 한국에 계신 황장엽 노동당 비서를 생각해내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예전에 김일성대 총장을 오래 하셨으니, 전직 김일성대 총장 명의로 서울대 총장에게 이 학생 좀 받아달라고 소개신을 한통 좀 써주십시오.” 그랬더니 황장엽 비서가 선뜻 써주겠다고 하더군요. 그 약속을 듣고 저는 서울대 어느 과목 석사에 갈까 찾기 시작했는데, 웬걸 서울대는 야간 석사과정이 없었습니다.

제가 그때 돈이 하나도 없으니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공부를 하려 했는데, 서울대엔 그냥 공부만 하는 석사과정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그래 좀만 돈 좀 벌고 공부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어디서 돈 버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력시장이란 곳을 찾아갔습니다. 새벽에 집에 나가서 하루 종일 포도주 상자를 부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때가 8월이라 포도주 실은 철통 안은 너무 달아있어 팬티 바람에 들어가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습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하루 종일 일해서 제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일당 4만 5000원을 받았습니다. 한 40달러 정도인데, 이중 일거리를 소개해준 회사에 10%인 4,500원 떼 주고, 교통비 떼고, 식비 3,000원 떼고 하니 3만 5000원 남았습니다. 그 돈이면 쌀 20키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 아무리 낮선 곳에 왔지만, 이젠 굶어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하는 생각이 들어 기뻤습니다. 그렇게 첫발을 떼서 자그마한 무역회사를 거쳐 주간지 기자가 됐고, 1년 넘게 주간지 기자를 하다가 2003년말에 동아일보에 입사했습니다.

제가 외국에 나와 있는 북한 친구를 만나면 아마 그가 이럴 것 같습니다. “한국에 가서 고작 기자가 되려고 갔나”고 말입니다. 북한처럼 언론이 어용언론인 곳에선 기자는 불쌍한 직업이죠.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기자는 대통령도, 장관도 비판하고, 김정은도 비판합니다. 기자들의 진실 보도로 박근혜 전 대통령도 감옥에 갔고, 이명박 전 대통령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제가 일하는 동아일보는 민족과 영욕을 함께 해온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내일모레 4월 1일은 동아일보 창립 98주년 기념일입니다. 남북이 다 아는 자랑스러운 신문의 기자로서, 열심히 일한만큼 남쪽의 각종 언론상을 거의 다 받았고, 지금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들고 있는 것은 참 행운입니다. 그래서 서울대, 하버드대 못 간 것 후회하지 않습니다. 남은 소원이라면 5월에 열리는 북미정상회담이 북미 수교까지 이어져 2년 뒤 동아일보 창립 100주년 때는 평양에 가서 취재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딱딱한 시사 이야기보단 사실 이런 얘기가 재미있지 않나요. 다음 시간에도 제 이야기 자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원본 사이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