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춰서는 북한

주성하-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21.07.23
nk_ppl_crossing-620.jpg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인 압록강변에서 북한 군인과 주민들이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가 얼마 전 대북 관련 업종에 있는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저도 예상하지 못한 아주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국에서 밀수품을 들여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요구하는 것이 전자시계약이라고 합니다. 아니, 쌀도 아니고, 기름도 아니고 왜 전자시계약이냐고 하니 지금 북한에서 시계가 다 멎었답니다. 이건 북한을 나름 잘 아는 저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네요. 시계가 없다는 것은 원시시대, 중세시대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전자시계약도 잘 들어가면 좋겠지만, 지금은 국경을 철저히 봉쇄해 걸리면 심지어 총살까지 막 하는 판이라 이 부피가 작은 전자시계약도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전자시계약이 작긴 하지만 사실 엄청 중요하긴 합니다. 시계는 손목시계, 벽시계 등 종류가 다양하긴 하지만, 어쨌든 약이 없으면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여기 한국에선 전자시계약이 중요하다고 생각해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약은 고사하고 시계도 점점 잘 팔리지 않습니다. 휴대전화를 보면 시간이 나오고, 노트북을 켜도 시간이 나오고, 티비를 켜도 시간이 나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만 가도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시계를 차는 사람들도 명품 비싼 시계 아니면 스마트 시계라는 것을 차고 다닙니다. 스마트 시계는 시간을 보기 위한 목적보다는 오늘 얼마나 걸었는지 걸음수가 시계에 뜨고, 자고 나면 몇 시간을 잤는지, 수면의 질은 어떻게 됐는지 이것도 나옵니다.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나지 않게 하고 다녀도 시계에서 문자나 전화가 오는 것을 알려줍니다.

현대 사회에 와서 순수 시간만 보기 위해 시계를 차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에서 시계는 정말 순수한 의미로 시간을 보는 기능에 충실합니다. 시계가 없으면 약속을 어떻게 잡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지금 북한에서 팔리는 시계는 거의 다 중국 전자시계죠. 총련에서 설비를 들여와서 모란봉이란 상표로 태엽식 기계시계를 만들던 때도 있었지만, 중국과의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투박하고 무겁고, 시간도 잘 맞지 않는 모란봉시계는 점점 자리를 잃다가 어느 순간 팔리지 않게 됐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살 때 중국 전자시계를 처음 샀던 것이 1991년이었는데, 그냥 숫자가 나오는 그런 시계였는데 그때 북한돈 100원이었습니다. 아마 그때쯤부터 중국에서 전자시계가 밀려 들어왔습니다. 그때 100원이면 비싼 축이었는데 제가 학교까지 1시간 넘게 걸어 다니다보니 시간을 모르면 지각을 하기 쉬워 부모님이 시계를 사주었습니다. 학생 중에 시계를 찬 아이들이 얼마 없어 그때는 전자시계만 차도 옆에서 부러워했습니다.

1980년대 북한에서 최고 명품 시계는 세이코였습니다. 일본 총련에 친척을 둔 귀국자들이 세이코 정말 많이 들여와서 팔아먹었습니다.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은 어느 순간부터 북한 사람들의 손목은 중국산 전자시계가 차지하게 됐습니다. 벽에 걸린 시계 역시 중국산 벽걸이 시계가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독이 된 것이죠. 북한이 코로나로 국경을 폐쇄한지 이제 벌써 1년 반이 다 되고 있습니다. 대다수 생필품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북한 전문가들의 관심사는 북한의 쌀값, 옥수수값, 외화 환율 이런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 사람들이 정말 당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식량도, 기름도, 설탕도 아닌 바로 전자시계약이라고 한다니 새삼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대북 봉쇄가 1년 반이 되다보니 이젠 북한 사람들이 차고 다니던 시계가 약이 하나둘 나갈 때가 됐습니다. 그런데 북한엔 시계 배터리 생산 공장이 없습니다. 북한의 시계는 손목시계든, 벽시계든 다 둥근 중국제 전자시계약을 쓰는 겁니다.

하지만 시계약은 수명이 있지 않습니까. 결국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가 하나 둘 멈춰서기 시작했고, 벽시계도 멈춰서기 시작한 것이죠. 시계약을 갈아줘야 하는데, 솔직히 북중 무역하면서 그리 비싸지도 않은 시계약을 사와서 집에 쌓아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미리 들어왔던 재고도 불티나게 팔리고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다가 지금은 그것도 없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티비는 정전 때문에 거의 나오지도 않는데다 저녁에만 방영합니다. 컴퓨터 같은 것도 거의 보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휴대전화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충전해서 쓰니 시간을 볼 수 있는데, 휴대전화도 인구의 4분의 1 정도만 갖고 있습니다. 가난한 지방 농촌 같은데선 시간을 볼 길이 없어진 것입니다.

시계란 것이 제가 앞서 말했듯이 언제나 주변에서 볼 수 있을 때는 그게 중요한 것인줄 잘 모르고 삽니다. 그런데 정작 없어져서 시간을 모르게 됐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엄청난 혼란이 생기는 겁니다.

요즘엔 북한에서 돌아가는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이 부러움을 사고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게 곧 부의 상징이 되고 있다니 참 희귀한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시계약을 만드는 게 그리 어렵습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핵무기 만든다, 대륙간탄도미사일 만든다, 잠수함 만든다 이렇게 떠드는데, 정작 그런 곳에 필수로 들어가는 손톱만한 시계약 하나 못 만들어 중세 시대로 돌아가게 생겼습니다.

최근 변종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북한이 언제 북-중 국경을 개방할지 점점 기약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나마 돌아가던 시계조차 하나둘 멈춰 설 것입니다. 과거고난의 행군시기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참상도 이겨냈던 북한 주민들이지만, 시간을 모르고 사는 사회는 여러분들이 여직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신세계일 것입니다.

손톱만한 시계약도 못 만들면서 자립식 주체경제를 떠드는 북한의 현실이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사작성: 주성하, 에디터 오중석, 웹팀 최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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