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김정은 시정연설의 본질
2024.01.19
이번 주 화두는 아무래도 김정은이 15일 발표한 시정연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시정연설에서 김정은은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한 데 이어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 버려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남북 관계의 틀이 분단 이후에 완전히 바뀌게 생겼습니다.
평화, 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고려민주연방제 통일방안 등 김일성 때부터 내려온 통일 원칙도 김정은이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물론 조국통일 3대 원칙이란 것도 알고 보면 다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긴 합니다. 김 씨 일가가 3대 세습으로 이어져 온 자신들의 권력을 순순히 내려놓겠습니까. 그동안 김 씨 일가가 80년 가까이 북한을 통치해 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대 퇴행적인 출신성분 제도에 묶여 매장이 됐습니까.
아마 김 씨 왕조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숫자는 혜택을 누린 사람들에 비해 몇 배로 많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통일이 되면 김 씨 일가를 용서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김 씨 왕조에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김 씨 왕조를 목숨 바쳐 사수할 생각을 할까요. 솔직히 북에서 출신성분이 좋아 간부가 됐다고 해도, 그 간부의 생활은 과연 좋습니까. 높이 올라가면 언제 숙청될지 몰라 벌벌 떨고, 낮은 간부면 또 그 사람대로 먹고사는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저의 경우는 북에서 그냥 서울에 왔을 뿐인데도 노동당 비서보다 더 잘 살고 있습니다. 먹는 것, 사는 것, 이동의 자유 등 모든 인간적 지표가 북한의 노동당 비서, 정치국 위원보다 낫습니다. 세계 유명 관광지를 유람하고, 세계 문화와 예술을 자유롭게 즐기는 것이 북한에선 누구에게도 허락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북한에선 99% 이상의 사람이 빨리 김 씨 왕조가 무너지고 통일을 하길 바랄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김 씨 왕조가 지금까지 통일을 외쳤던 것은 완전한 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일은 스스로 자신의 목에 올가미를 매는 행위이고, 할 생각도 없지만 외부에 분단 세력으로 비춰지기 싫으니 통일을 지향하는 척했을 뿐입니다. 정작 통일이 될 상황이 되면 그 누구보다 극악하게 가로막을 자들이 바로 김 씨 독재자들입니다. 이 정도는 여러분들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 김정은이 그런 거짓을 버리고 본색을 드러낸 것은 어쩌면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봅니다.
김정은의 주장은 한마디로 남북이 서로 건드리지 말고 살자는 것입니다. 한국에 대한 영토 평정을 부르짖는 김정은의 허세와 다르게, 서로 통일이란 말도 하지 말고 살자는 말은 김정은의 위기감과 나약함을 보여줍니다.
솔직히 말해 북한의 국력이 한국을 압도하면 따로 살자고 하겠습니까. 센 쪽이 통일을 하자고 계속 약한 쪽을 압박하겠죠. 어차피 우리가 세니까, 둘이 합쳐도 우리 주도로 통일 이후 관계가 수립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북한의 국력이 약하니까 김정은의 말 속에 숨은 의미는 “제발 우릴 이대로 내버려둬. 내가 주애한테 권력을 상속하고 우리 이 땅만 차지하고 살 테니까, 그리고 남쪽은 넘보지 않을 테니까 제발 나를 이대로 살게 해줘”라는 절망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솔직히 남쪽 사람들은 김정은이 ‘나를 건드리지 말고 그냥 조용히 있어 달라’는 말이 나쁘진 않을 겁니다. 북과 남은 경제력 수준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국력을 비교할 때 가장 먼저 꼽는 지표인 국민총생산액을 따지면 한국은 작년에 1조 7,000억 달러 정도 되고, 북한은 한국의 1.7% 정도 되는 280억 달러로 추산됩니다. 북한에 들어가 직접 조사해 볼 수가 없으니 북한 경제 지표가 정확하다고 할 수 없지만 제가 봤을 때 대개는 과장이 많습니다. 정확히 따지면 남과 북의 경제 격차는 100 대 1 정도 될 겁니다. 100대 1이나 100대 1.7이나 거기서 거기긴 하지만, 아무튼 김정은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부자나라 대한민국은 거지처럼 사는 북한이 “우리가 형제가 아닙니까. 도와주세요” 이러고 매달리지 않으면 차라리 좋겠죠.
여러분이 살고 있는 동네를 둘러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잘 사는 사람이 오히려 “제발 우릴 건드리지 말아줘. 제발 좀 찾아오지 말라”고 하지 가난한 사람이 “제발 우릴 도와주지 말라”고 합니까.
그런데 지금 김정은은 우리의 일반적 상식과 전혀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김정은이 인민을 식구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 나쁜 가장이기 때문입니다. 부자 형제가 도와주겠다는데도 거절하는 것은 그런 지원으로 자신의 권위가 떨어질 것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너는 어떻게 했길래 식구들이 이렇게 굶고 있냐”는 비난이 싫기 때문입니다.
식구들이 굶어 죽겠으면 죽고 상관없이 그냥 가장으로서의 자기 권위만 지키고, 자기가 예뻐하는 자식 하나만 챙기겠다는 심보가 바로 김정은의 심보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사는 식구인 북한 인민이 잘사는 큰집인 대한민국을 동경할까봐 문을 꽁꽁 닫아 매고, 나가지도 못하게 하겠다는 심보입니다.
배고픈 아이가 “아버지, 큰아버지 집에선 고소한 냄새가 나요” 했더니 “고소하다고 하는 놈은 타락한 놈”이라고 매를 들고, “아버지, 큰아버지 집 애들은 좋은 새 옷을 입고 다녀요” 했더니 “썩어빠진 생각이 머리에 들어찼다”고 또 매를 드는 게 김정은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큰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까지 몽땅 끊어버리겠다고 하는 것이 김정은의 이번 시정 연설의 핵심입니다. 하루라도 더 생명을 연장하려고 저렇게 발버둥을 치는 김정은을 보면서, 나쁜 가장의 인질로 잡혀 사는 북한 인민이 정말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