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벌써 5월 초순도 다 지나 본격적인 농번기가 다가 왔습니다. 해마다 지금쯤이면 북한 전국이 농촌에 나가 농사를 도와주었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온 나라가 매달렸음에도 북한은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사회주의 협동농장 체제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 없고, 열심히 해봐야 다 국가에서 뜯어가는 데 누가 열심히 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올봄부터 많은 농장들에서 가족단위 분조경영제를 도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앞으로 농사를 지으면 50%를 자기 몫으로 받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물론 북한 당국이 하는 소리는 나중에 가봐야 아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번 봄은 여러분들이 기분이 좋으실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번 조치는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정책과 유사합니다. 중국도 1980년부터 농호별 생산량 도급제라는 사실상의 가족단위 영농제를 본격 도입했습니다. 모든 제도라는 것이 한순간에 자리 잡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도 1984년에 가서야 농가 99%가 가족단위 생산방식으로 재편됐습니다. 1978년에 첫 농호별 생산량 도급제가 시작된 때부터 6년이란 기간이 걸렸습니다. 북한도 이 제도가 자리를 잡으려면 5~6년 정도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봅니다.
북에서 가족단위 분조경영제가 본격 도입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만감이 교차합니다. 지금까지 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 가야 할 길은 가족농 뿐이라고 외쳤다가 잘못됐습니까. 반당반혁명분자로 몰려서 간부와 농민들이 많이 잡혀갔죠. 그런데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을 시대를 앞서 말했다가 억울한 목숨이 정말 많이 스러져 갔습니다.
이번에 새 경영제가 도입됨에 따라 많은 농민들이 김정은이 훌륭하다고 기대를 많이 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혀 고마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김정은에게 남은 길은 이 길뿐이거든요. 물론 농민들의 희망을 막 짓밟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역사와 정치를 알게 되면 김정은은 자기가 살기 위해 마지막 선택을 했을 뿐이란 점을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중국의 가족단위 농업생산제도도 흔히 등소평이 만든 것이라고 알려져 있고 그가 칭송받는 이유 중 하나이죠. 하지만 사실 내막을 보면 이것도 등소평이가 직접 구상해 도입한 것이 아닙니다. 중국 가족단위 농업생산제도를 있게 한 주인공들은 따로 있습니다.
1978년 중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인 안휘성에 자연재해가 들이닥쳐 대기근이 시작됐습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봉양현 소강촌 인민공사의 농민 18가족이 어느 날 밤 비밀리에 모였습니다. 이들은 이날 밤 한 장의 비밀문서를 작성하고 18개의 빨간 손도장을 찍었습니다. 그 문서에는 자연재해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제부터 농사는 가족단위별로 책임지고 짓자. 만약 이것이 들켜 누가 감옥에 간다면 다른 가족이 감옥에 간 사람이 남긴 가족을 돌보자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얼마나 비장한 문서입니까. 그때만 해도 중국은 가족농을 몰래 하는 것이 적발되면 감옥에 보냈거든요. 첫해 이들은 엄청난 생산증대를 이뤘습니다. 국가에 계획을 다 바치고도 풍족한 양을 집에 가져 갈 수 있었죠.
하지만 이런 비밀이 오래 갈 리가 있겠습니까. 주변에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농민들은 이를 신고하는 대신 우리도 그렇게 하자하고 너도나도 몰래 도입했습니다. 이것이 1980년에 중앙에 보고가 들어갔고 등소평도 알게 됐습니다. 등소평의 업적은 이때부터죠. 등소평은 대담하게 이를 인정하고 전국에 보급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1978년에 3억 톤에 불과했던 식량생산은 1984년에 4억 톤에 이르러 비로써 중국은 굶어죽을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이게 중국이 가족농을 도입한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떻습니까. 물론 북한에는 안휘성 농민들처럼 비밀서약을 하고 가족단위 경작을 시작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개인농, 소토지가 광범위해서 농민들이 협동농장보다는 자기 소토지에 가서 더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니 협동농장은 오래 전에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죠.
협동농장으로 더는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없으니 결국 김정은이 손을 들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는 김정은이 인민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조치입니다. 대다수 독재자들은 사실 인민들이 굶어죽건 말건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수십만 명이 굶어죽어도 눈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체제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면 현실과 타협하게 됩니다.
등소평도 개인적으로 인민을 생각하는 맘도 있었겠지만, 중국이란 공산당 독재 체제를 더 잘 유지하기 위해선 인민들이 불평불만이 없이 공산당을 잘 따르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그 불평불만을 잠재우는 길이 바로 인민을 잘살게 만드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거죠.
김정은도 오래 집권하려면 인민들이 불평을 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겠죠. 외부에서 계속 식량지원을 해주고, 돈도 주고, 외화를 벌수 있는 합작기업도 지어주었으면 김정은의 변화는 더 늦었을 겁니다. 이는 지금 북한을 고립 압박하는 정책이 가져온 긍정적인 면이기도 합니다. 물론 저는 그런 정책을 앞장서 찬성하지 않지만 모든 정책에는 장단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앞으로도 김정은이 자기 살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변화를 이뤄가길 바랍니다.
지금 김정은 외화주머니 사정도 좋지 못합니다. 그런데 김정은이 측근들의 충성심을 계속 사려면 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니 또 무슨 개혁을 빙자한 조치가 나올지 기대됩니다. 이렇게 점차 변화되다보면 좋은 날도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