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북에 간 동아일보 첫 여기자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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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가 탈북해 2002년 한국에 도착했고, 2003년부터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지 벌써 20년이 됩니다. 동아일보는 1920년에 창간돼 벌써 103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회의가 4.19혁명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면서 동아일보 호외 5건, 조선일보 호외 1건을 함께 유네스코 기록물로 올렸습니다. 한국 언론사의 신문 보도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동아일보의 유구한 역사가 또 한번 빛을 발하게 된 중요한 사건이죠.

이번 사례에서 보다시피 동아일보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함께 해왔고, 김일성이 해방 전에 유명해진 것도 동아일보가 보천보전투를 처음 보도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김일성이 북한에 들어가 독재자가 된 것을 감안하면 그때 띄우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건 잘못한 것 같습니다.

동아일보의 100년 역사를 쭉 거슬러 올라가면 정말 쟁쟁한 인물들이 너무 많이 나옵니다. 김형직도 동아일보 지국장을 지냈습니다.

특히 저의 경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우리나라 최초의 변호사인 허헌 선생입니다. 허헌은 1924년에 창간 4년 밖에 안 된 동아일보사 사장을 지냈고 북으로 올라가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지냈고, 1951년 여름에 청천강을 건너오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허헌이 동아일보 사장을 지내고 김일성대 총장을 지냈다면, 저는 먼 훗날 김일성대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살고 있으니 이 역시 민족사에 묘하게 엇갈린 궤적이 되겠네요.

허헌은 북한 사람들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잘 모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의 딸은 누구나 잘 알고 있겠죠. 바로 민족과 운명 17~19부의 주인공 허정숙입니다. 영화에선 허정순이라고 나오지만, 이 인물이 1902년에 태어나 1991년 89세로 사망한 허정숙이 원형이라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런데 허정숙은 동아일보의 최초 여기자로 활동했습니다. 대단한 기록이긴 하죠.

나중에 북에 올라가서 1948년에 북한 최초의 문화선전상을 지냈고, 전쟁 뒤인 1957년 사법상, 1959년 최고재판소장, 1972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1983년 당 비서 등의 요직을 거쳤습니다.

89세로 사망했을 때 조평통 부위원장, 조국전선중앙위 의장, 해외동포원호위원장 등의 직책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북한은 공화국 국장으로 7일장을 했고, 애국렬사릉에 안장했습니다.

영화에선 허정숙은 해방 전에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은 그가 추구했던 세계관이 김일성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허정숙은 1920년대 중반 동아일보 기자로 있을 때 같은 동아일보 기자이자 나중에 남로당 당수가 된 박헌영과 서울 최고의 미인으로 꼽혔던 주세죽이란 여성을 중매시켜 결혼시키기도 했습니다.

허정숙의 일생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그가 36살 이전에 결혼을 7번이나 한 것입니다.

22살 때 결혼한 첫 남편 임원근은 조선공산당 간부였고, 그 역시 1924년에 결혼할 때 동아일보 기자였습니다. 임원근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친했습니다. 하지만 임원근이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니 허정숙은 바로 또 다른 공산주의자인 송봉우와 동거했습니다. 이미 임원근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는 상태에서 송봉우의 아들을 또 낳았습니다.

몇 년 뒤엔 또 남자 바꿔서 또 아들을 낳고 이런 식으로 바꾸다가 1938년에 결혼한 최창익이 일곱 번째 남편입니다. 그리고 해방 후엔 최창익과 이혼했는데, 최창익이 나중에 재혼할 때 그 결혼식에 와서 축사도 불렀답니다. 이러니 당시 허정숙을 알던 사람들은 저 여자는 정조 관념도 없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1930년대 허정숙은 ‘연애유희론’이라는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골자는 성적 만족을 위해서라면 정신적인 사랑 없이 육체적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없이도 성관계는 가능하고, 사랑해야만 성관계를 가져야 하며 결혼을 해야만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망상이자 폭력이며 독선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론을 그 자신이 직접 보여주었죠. 해방 전에야 봉건 사상이 강해서 허정숙은 남쪽에서 손가락질 당하고 더 이상 머물기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최창익과도 아들 둘을 낳고 살았지만, 나중에 최창익이 숙청될 때 냉정하게 등을 돌리고, 둘 사이에 낳은 아들 둘의 성을 허 씨로 고쳐 버렸습니다.

최창익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그는 연안에서 김두봉, 무정 등과 함께 조선독립동맹 부주석을 지냈고, 북에선 부수상까지 지내다가 김일성 빨치산파에 숙청됐죠.

허정숙도 1960년대 종파로 농장에서 혁명화를 했지만, 이후엔 김일성에게 열심히 복종해 죽을 때까지 호사를 누렸습니다. 북에 올라가선 자유연애를 얼마나 했는지 궁금하긴 한데, 무수한 여인들을 품었던 김일성, 김정일과 죽이 잘 맞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인물을 평가하려면 공과를 다 평가해야 하는데 북한은 무조건 충신이라고 왜곡하니, 오늘 제가 허정숙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대단한 여성이었고, 동아일보의 첫 여기자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죠. 동아일보의 100년사에는 이렇게 민족이 걸어온 길이 다 녹아있습니다. 제가 북한 김정일, 김정은 체제를 비판했던 많은 기사와 칼럼들도 다시 100년 뒤 누군가에 의해 재조명되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