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북한이 선전하는 백두혈통이 바뀔 뻔한 사연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백두혈통이라는 것이 거슬러 올라가면 김일성부터 시작하겠죠. 김일성은 자기가 전주 김씨라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일 가능성이 100%입니다.
김일성의 내력은 증조할아버지부터 등장하는데, 김응우는 평양 만경대의 산당지기였습니다. 즉 남의 묘를 봐주고 땅을 얻어 농사짓는 그런 천한 신분인데 북한은 이런 산당지기 김응우가 미국 셔먼호 공격을 이끌었다고 합니다. 셔먼호는 평양 감영이 나서서 공격했고, 기록도 다 있습니다. 일개 비천한 산당지기 말을 누가 듣습니까.
당시에 성을 갖고 산 사람들은 양반인데, 양반이 천한 묘지기나 하고 있겠습니까. 보나 마나 19세기 말에 노비 해방이 이뤄질 때 묘의 주인 성 씨를 따서 김 씨라고 했겠죠. 이렇게 김일성 집안은 근본이 있는 집은 아닙니다. 물론 저도 근본 따지는 사람이 아니고, 저의 선조가 양반이든 노비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할 사람이지만, 하도 북한이 혈통 따지니 그거 노비혈통이라고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북한에선 김일성의 처인 김정숙을 불요불굴의 항일 투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김일성은 김정숙보다 먼저 같이 살고 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성의 이름은 김혜순인데, 회고록에도 아주 잠깐 등장합니다.
김혜순은 빨치산 생활을 일찍 시작했고, 항일연군 여성 대원 중에 비교적 예쁜 얼굴에 속했습니다. 그의 사진도 있습니다.
당시 항일연군 부대를 보면 남성과 여성이 대략 8대2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되고, 높은 간부 순서대로 예쁜 여성과 짝을 이루는 일이 많았습니다. 산에 있으니 당연히 결혼식이란 것도 없고, 그냥 데리고 사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김혜순은 3~4년 정도 김일성의 여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때 김정숙은 김일성의 경호중대장 지갑룡의 여자였습니다. 어떻게 이게 바뀌었는지는 나중에 들려드리겠습니다.
김혜순은 1939년 5월 4일 진행된 반절구 전투에 참가했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습니다. 김일성은 김혜순을 밀영에 보내 치료받게 했는데, 이후 김일성 부대 참모장 임수산이 변절해 밀영 위치를 다 불면서 김혜순이 은거한 근거지에 토벌대가 들이닥쳤습니다. 1940년 4월에 있은 일인데, 이때 조선일보 1940년 7월 5일 자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김일성의 애처가 귀순, 선무공작제일선에. 소설 같은 전향의 경위’라는 제목이 이 기사에 따르면 김혜순은 4월 초순 장백현 십오도구 군정동과 삼포동 사이의 밀림지대 속의 한 숨겨진 산채에서 잡혔습니다. 저항하는 남성 빨치산 2명을 사살하고, 김일성의 애처 22살의 김혜순과 김혜순의 간호원 격인 25세 박정숙을 생포했다고 기사는 밝히고 있습니다. 또 기사에는 13세 된 김혜순이간도폭동사건 때 용정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에게 ‘길잃은 어여쁜 아가씨’로 발견됐고, 자라면서 김일성과 동거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김혜순은 김일성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유산을 몇 번이나 했다는 빨치산 참가자의 증언자도 있습니다.
산채를 습격한 일제 부대는 악명이 높았던 노조에 토벌대 산하 나가시마 공작대였습니다. 이때 일제는 귀순 공작을 열심히 하던 때라 전향만 하면 살려주었습니다. 나중에 나가시마가 1971년 회상하기를 자기 집에서 김혜순을 몇 달 데리고 있었고, 김혜순은 자기 처와 친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귀순 공작은 실패했죠. 김일성이 소련으로 도망가서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혜순은 2년 뒤 평범한 남자와 재혼하고 아들 둘을 낳습니다.
해방이 되자 김혜순은 함북 부령군에 와서 농사를 짓고 삽니다. 그런데 김혜순이 워낙 사회 활동 능력이 뛰어나서인지 함경북도 여맹 간부가 되고 해방 후에 평양에서 열린 여맹 간부 회의에 참가합니다.
이때 과거 전우들과 상봉하게 되죠. 김혜순 정도면 고참이니 살아서 북한에 돌아온 여자 빨치산 중에선 과거 상관이었고, 또 김일성의 여자였다는 후광도 있습니다.
어느 날 김혜순은 다른 빨치산들과 같이 김일성 집에 가서 저녁을 먹으며 김일성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때는 김일성에게도, 김혜순에게도 다 새 짝이 있었고 자식들도 있으니 운명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김일성은 김정숙이 죽은 뒤에도 여러 여자들을 거치며 살면서도 김혜순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매정했던 거죠.
그러다가 70살이 썩 넘은 1980년대 중반쯤 돼서 지나가던 말로 “김혜순 동무를 해방 후에 봤는데 살아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찾아보니 김혜순은 여전히 부령에서 살고, 아들 둘은 부모가 출신성분이 나쁘니 농장원으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이 찾는 여자니까 즉시 소환해 보통강구역 항일투사 아파트에 보내고 아들은 즉시 간부로 승진했습니다.
김혜순이 언제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할 때까진 간호해 주다 같이 잡혔던 박정숙과 함께 살아있었습니다. 재미 언론인 문명자가 김일성 사망 직후인 1994년 7월 25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김혜순과 박정숙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9월 한국 <말>지에 ‘항일무장투쟁 여전사 박정숙, 김혜순 인터뷰: 나의 사령관 김일성 장군’이라는 글을 씁니다.
김혜순이 체포되지 않았다면, 김일성과 김정숙이는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 김정일도 없고 김정은도 없었을 겁니다.
김혜순이 잡힌 것은 북한 인민들에겐 불행의 시작일지도 모르지만, 역사에는 가정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김일성 아들이 좋은 사람이 될 확률은 높지 않겠지만, 그래도 김정일처럼 권모술수에 능하고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태어났겠습니까.
오늘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김일성의 족보에 대해 일부 말씀드렸습니다. 백두혈통 그따위가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여러분들이 빨리 깨닫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칼럼내용은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