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김춘애∙ 탈북 방송인
201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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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아동백화점을 찾은 어린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다.
평양의 아동백화점을 찾은 어린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나는 평양의 모니카입니다.’라는 책을 우연히 구입해 읽었습니다. 책 내용은 주인공 모니카가 1972년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의 막내딸로 태어나 7살 나던 해, 1979년 아버지가 쿠데타로 인해 죽음을 당한 뒤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웠던 김일성의 도움으로 북한으로 피신한 뒤 겪는 이야기입니다.

모니카는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평양이라는 낯선 도시에 도착해 양부 김일성의 보살핌으로 16년간 만경대 학원을 졸업하는 등 북한사회의 문화와 교육을 받으며 북한사람으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철이 들면서 그녀는 다른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1994년 평양을 떠나 스페인 사라고사와 마드리드, 미국 뉴욕을 거쳐 2007년 대한민국에 도착해 적도 기니로 떠나기까지의 다양한 경험과 가혹했던 지난날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나고 자라 탈북하기 전까지 수십 년을 살아온 저였기에 그녀의 책에서 제일 인상 깊게 읽은 대목은 ‘평양,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란 내용이었습니다. 그녀 역시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보내 마치 평양이 고향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했었고 동창생들과 아는 이들이 그리운 마음에 그녀는 북한을 떠난 지 10년만인 2004년에 다시 평양에 방문단으로 가게 됐다고 합니다.

순안비행장과 평양의 거리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고 16년간 살아온 북한 체제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어 놀라울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입국심사부터 시작해 많은 감시원들이 알게 모르게 따라다닌다는 것과 호텔에 도착한 뒤 저녁 7시 이후에는 외출을 삼가라는 것, 반드시 혼자 나가지 말고 통역과 함께 가야한다는 것, 사진을 찍을 때에는 동상이나 초상화를 배경으로 찍어서는 안 된다는 것 등 모든 통제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몇 번 만에야 겨우 승인이 되어 평양에 살 때 자주 다니던 미용실을 찾았다고 합니다. 지난날 자기 머리를 유일하게 만질 수 있었던 김 아주머니를 만났고, 다시 만난 기념으로 머리를 했는데 10년 전 대학시절과 꼭 같은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거울을 보는 순간 촌스러운 머리모양에 그만 대학시절이 생각나 울먹거렸다고 합니다.

락원 백화점과 고려호텔로 걸어가면서 그녀는 10년이 흘렀지만 마치 시간이 멈춰진 것처럼 그 모습 그대로 낡아가고 있는 도시를 보니 걷는 내내 왠지 슬픈 느낌이 들었다고 썼습니다. 이 글을 읽는 제 머리 속에는 내가 나서 자란 유년시절과 젊음을 보낸 내 고향 평양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광복 거리에 있는 락원 백화점 역시 제가 자주 친구들과 함께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제가 있을 당시 만경대 구역 입구와 지하철 광복 역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락원 백화점에는 다른 백화점과 다르게 주로 수입한 중국 상품들을 배정표와 안내표를 통해 주민들에게 공급했거든요.

또 있습니다. 평양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바로 대동강과 고려 호텔, 그리고 모란봉과 능라도, 옥류관, 청류관이죠. 만경대 천석식당과 지하철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마치 고향집에 앉아 있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자주 옥류관과 청류관에서 쟁반국수와 아이스크림을 먹던 지난날 모습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아침부터 옥류관 매표소에 줄을 서서 표를 구입하노라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순서가 되었고, 그렇게 식탁에 앉으면 누구나 쟁반국수 한 그릇이 작다 할 정도로 뚝딱 먹었습니다.

아마 지금 그 쟁반국수를 다 먹으라면 저 역시 벅찰 것 같기도 합니다만 우리 아이들 역시 10대의 어린 나이였지만 쟁반국수 한 그릇을 후딱 먹고는 북한에서 제일 고급인 우유가 많이 들어간 아이스크림까지 먹어야 집으로 발걸음을 떼곤 했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제2의 옥류관으로 불리는 모란봉에 있는 모란각에 아이들과 함께 가기 위해 무궤도 전차에서 내려 아동백화점과 천리마 동상 그리고 모란봉 지하극장과 을밀대를 거쳐 모란봉으로 오르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햇볕에 땀을 많이 흘리며 앞서 가던 당시 10살이던 아들이 누렇게 익어 가는 살구를 보고는 살구나무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모란봉에 심은 살구나무는 아무리 먹음직스럽게 익어도 먹을 수 없는 개살구였습니다.

저는 아들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개살구라는 것을 알 리 없는 아들은 나무를 연속 흔들었습니다. 잘 익은 살구가 후드득 땅에 떨어지자 두 딸이 교복치마 자락에 마구 주워 담았습니다. 남편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웃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관리원 아저씨가 막 달려왔습니다.

그만 그 아저씨에게 단속이 되어 조서를 쓰고 벌금을 내고 하다 보니 시간이 지나 모란각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 약속을 아이들에게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 아이들은 모란봉에 가자고 하면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했었답니다. 낡아가고 있지만 변한 게 없는 평양이라면 개살구나무는 여전히 잘 자라고 있을까요?

제가 지나간 추억을 하고 있는데 아들이 책을 읽다 말고 저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물었습니다. 책 제목을 알려주며 이 책을 보니 새삼 고향생각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아들 역시 가끔 고향생각이 난다며 옥류관 쟁반국수가 그립다고 합니다. 저는 말이 난 김에 저녁식사로 옥류관 쟁반국수는 아니더라도 옥수수 온반으로 고향의 향수를 느껴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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