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백화점 쇼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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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9월 중순입니다. 찜통더위도 가시고, 가을을 알리는 백로도 지난 요즘은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들판의 벼도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아름다운 가을 단풍구경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렙니다.

하지만, 반면에 서운한 것이 있습니다. 가을이 가고, 얼마 안 있어 겨울이 지나면 또 한 살을 먹게 된다고 생각하니 자꾸 해놓은 일 없이 나이만 먹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서글퍼집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비록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이지만, 지옥 같던 북한을 떠나온 것입니다. 좀 더 일찍 왔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늦게나마 남한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이 한 생을 살아오면서 제가 한 일 중에서 제일 잘한 일 중의 하나라고 당당하게 자랑하곤 합니다.

남한에 와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처럼 살아가는 저는 언제나 너무나 열악했던 북한에서의 생활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아이들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던 저는 남한에 와서 얻은 손자, 손녀에게는 아낌없이 제일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고 싶었습니다. 하여 남한에 온 지 이제는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그동안 아이들을 먼저 챙겨 주느라 나 자신을 위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저는 남한에 와서 사는 동안 너무도 앞만 보고 달린 듯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엔 나 자신을 위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지난달에 저는 딸들이 살고 있는 평택에 가서 평택전철역사 안에 있는 애경백화점으로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곳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백화점에 간 것이었습니다. 정말 화려하고, 멋있었고, 없는 것 없이 뭐든지 고급스러웠습니다. 보이는 물건이 모두 내 마음에 꼭 들었고, 갖고 싶은 충동까지 생겼습니다. 가방을 파는 판매대 앞에서 저는 많은 가방들을 만져 보기도 하고, 들어 보기도 했습니다. 이 가방, 저 가방 만져보는 저를 보고 큰딸은 마음에 드는 가방이 있으면 사라고 권했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며 뜸들이고 있는 저에게 큰딸이 '이제는 엄마 인생을 누리면서 살라'고 용기를 줬습니다.

거의 반나절 동안 백화점 안을 돌고 돌며 생각을 해 보니 정말 나를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써 본 적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 날 우리 아이들에게 해주지 못해서 마음 아팠던 기억 때문에 자식들과 손자, 손녀를 위해서는 비싼 물건도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샀지만 제가 원하는 물건을 사느라 큰돈을 써본 기억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다른 여자들과 똑같은 여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옷도 입고, 빛깔 좋은 구두를 신고, 멋있는 가방을 들고 다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저도 대담하게 '그래, 나도 이제는 나를 위해서 돈을 아끼지 말고 한번 써보자' 하고 큰딸에게 말했습니다. 값나가는 돈지갑도 샀고, 가방도 하나 구입했습니다. 가방에 맞춰 고상한 치마와 상의 한 벌도 구입했습니다. 거의 한달 봉급 정도의 금액을 신용카드로 사용했습니다. 신용카드는 현금 대신 사용할 수 있는데, 물건을 살 때 우선 카드를 사용하면 카드회사에서 돈을 대신 지불해 주고, 본인은 그 금액을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카드회사에 지불하면 됩니다.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제 자신을 위해 큰돈을 쓰는 기분에 한창 들떠 있는데 손전화기가 울렸습니다. 어떤 남자 분이 전화를 해서는 지금 평택에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저는 얼결에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고객님의 집은 서울인데 어떤 이유로 평택 애경백화점에 있느냐고 다시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큰 소리로 왜 남의 개인 정보에 대해서 이것저것 캐묻느냐고 북한 사투리로 퉁명스럽게 되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차분한 목소리로 5월 30일자로 카드를 만들어 여태 한번도 그 많은 돈을 쓰지 않았는데 갑자기 많은 돈이 빠지기 때문에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한번 '내 카드로 내 돈을 내가 마음대로 쓰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처음과 같이 차분한 목소리로 '알았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요즘 사기 전화가 많다는데 이거 무슨 사기 전화가 아닌가 싶어 큰 사위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했더니 큰 사위는 차분하고 천천히 이해가 되도록 설명해 주었습니다. 요즘은 발전이 되어 카드회사에서 평소에 카드를 많이 쓰지 않던 카드사용자가 갑자기 한꺼번에 큰돈을 사용하면 혹시 누군가 훔친 카드로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전화로 확인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난데없는 전화로 한순간 기분이 좀 상했었지만, 백화점에서 처음으로 저를 위해 비싸고 예쁜 옷에 값나가는 가방과 지갑을 사며 느꼈던 그 희열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