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나이가 들면서 주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친구들과 모여 앉기만 하면 손녀, 손자 자랑 뿐이니 말입니다. 어제도 친구들에게 손녀 자랑을 한창 하고 있는데 손전화기에 신호가 왔습니다. 까만 원피스를 입고 모델처럼 온몸을 꼬는 자세를 하고 찍은 4살짜리 손녀의 사진이 손전화기로 보내져왔던 것이었습니다.
혼자 보기가 너무 아까워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자랑을 하며 보여줬습니다. 이곳 서울이 고향인 한 친구는 저에게 요즘은 손자를 자랑해도 돈을 내놓고 자랑을 해야 한다는 말에 저는 돈지갑을 열고, 3만원을 책상에 내놓고 더 큰 목소리로 자랑을 했습니다. 모두가 배를 쥐고 크게 웃었습니다.
이렇게 한참을 정신없이 웃고 있는데 이번엔 전화 벨소리가 울렸습니다. 손녀였습니다. "할머니 피아노 사 주세요."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하는 말에 저는 깜빡 잊고 있었구나 하면서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그래그래 사 줄게. 내일 할머니가 가서 꼭 사 줄께" 하고 저는 약속을 했습니다. 지난 추석 명절에 손녀에게 피아노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만 잊고 있었습니다.
다음날이 바로 주말이어서 저는 평택으로 갔습니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생각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평택에는 큰딸, 작은딸 두 딸이 살고 있는데 제가 평택에 간다는 것을 두 딸에게 알리면 작은딸은 항상 언니 집에서 저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이번엔 큰 딸네 손녀에게 피아노를 사주려는 참인데 작은딸이 알면 혹시 샘을 내지 않을까 해서 작은딸한테 전화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던 끝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마침 작은 딸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천만다행이었습니다.
평택에 도착한 저는 큰딸과 손녀와 함께 급한 마음으로 피아노 학원을 찾았습니다. 4살짜리 손녀가 골라잡은 피아노는 강사님의 말에 의하면 괜찮고 이름 있는 피아노라고 했습니다. 저는 원장님이 소개해 준 전화번호로 바로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루가 급하니 빨리 집으로 배달을 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날 아침 7시에 사장님이 직접 피아노를 가지고 와서 조립까지 해주었습니다. 피아노 설치가 끝나자마자 손녀는 조금 서툰 발음으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를 부르면서 노래에 맞춰 피아노 건반을 눌렀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대견한지 저는 손녀를 번쩍 안아 올렸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르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얼마 후 작은딸이 손자를 유모차에 태우고 큰딸네로 왔습니다. 작은딸에게는 일단 비밀로 하고 싶었지만, 천진난만한 손녀가 이모에게 할머니가 피아노를 사주었다고 자랑을 하는 바람에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는 말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작은딸 손자는 이제 겨우 10개월 밖에 되지 않아 다행히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좀 서운해서 저는 아기 옷 파는 가게에 들러 위아래 옷 한 벌에 조끼를 받쳐 겨울옷 신상품을 사 주었습니다.
저녁 무렵 아들이 서울에서 자가용차를 타고 저를 데리러 평택으로 내려왔습니다. 온가족이 모여 저녁식사를 맛있게 하고 아들과 저는 서울로 향했습니다. 한창 차를 운전하던 아들이 "엄마, 다음부터는 평택에 내려오지 마" 하고 뜬금없이 말을 했습니다. 평택에만 내려오면 엄마의 통장은 빈털터리가 되는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아들에게 저는 웃으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엄마는 너희들의 대견한 모습만 바라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어. 그리고 이제는 욕심이 없어졌단다. 이곳 한국에 와서 우리 식구가 얼마나 불었니? 엄마는 이미 부자가 됐어." 그렇습니다.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저는 이미 부자입니다. 저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지난 날, 제가 우리 아이들을 키울 때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아 남들처럼 해주지 못한 것이 많았습니다. 부모 능력이 부족해 우리 아이들은 큰 포부도 희망도 마음대로 가질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부모들이 그러하듯이 해주고 싶어도 마음대로 해줄 수가 없었던 지난날의 아픔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저에게 있어서 손녀, 손자는 내일을 꿈꾸게 해주는 희망이며 미래입니다.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또 하나의 자랑꺼리가 생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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