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손녀와 탈북자 친구

꽃 피는 봄도 지나고 땡볕 아래 무덥던 여름도 지나고 어느 덧 가을입니다.
김춘애∙탈북자
2009.09.28
주위에서 가을이 되면 울적해진다는 사람들에게 ‘가을을 탄다’고 말을 하는 것을 많이 들었는데 요즘 제 마음을 들여다보면 딱 가을을 타는 듯합니다. 벌써 또 한 해가 다 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요즘 갑자기 쓸쓸해집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울적한 마음만 빼면 가을은 정말 축복의 계절입니다. 산에는 단풍이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 가고, 들녘에서는 누렇게 익은 벼이삭들이 고개를 숙인 채 산들산들 가을바람에 춤을 추고 있습니다.

벌써 벼 가을걷이가 시작된 곳도 있습니다.

남쪽은 안그래도 먹을 것이 풍요로운데 올해는 더군다나 풍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수퍼마켓이나 시장에 나가 보면 과일 진열대에 보기만 해도 침이 도는 울긋불긋 각양각색의 과일들이 가게 앞을 수놓고 있습니다.

빨간 사과, 노랗게 잘 익은 배, 검푸른 빛의 포도와 청포도, 주황색 감귤까지, 그냥 보기만 해도 배가 부릅니다.

왁자지껄한 시장 풍경을 좋아하는 저는 지난 주말에 평택에 있는 딸네 집에 갔다가, 아장아장 걷는 손녀의 손목을 잡고 집 근처 시장을 다녀왔습니다.

손녀가 잘 먹는 청포도를 산 뒤 “엄마 뚱, 아빠 뚱” 하며 이제 겨우 말을 떼기 시작한 손녀의 노래를 들으며 딸 집으로 돌아가면서 “행복이 별 건가? 이것이 바로 행복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울적했던 마음도 좀 나아졌습니다.

큰 딸이 식당 일을 하기 때문에 저는 요즘 한 달에 이틀씩 손녀를 돌봐 주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아직 말이 서툴러 말을 알아듣기 힘들어 손짓 몸짓하며 의사소통을 하는 세 살짜리 손녀를 데리고 나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번 쳐다봐 주고 말을 건넵니다.

손녀를 보고 “늦둥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가끔 있습니다. 남쪽엔 40살이 훨씬 넘어서도 아기를 낳는 여성들이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저는 얼마 전, 손녀의 두 돌 생일에 옷 가게에 가서 제일 좋고 예쁜 옷과 신발을 선물했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새 옷을 털고 또 털어 입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제법 자랐다는 생각에 얼마나 대견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요즘 들어 제게 안 좋은 일이 좀 있지만, 이렇게 아무 탈없이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손녀를 보면서 온갖 걱정 근심을 다 쫓아버립니다.

미역국에 밥을 먹는 모습도, 넘어질 듯 아장아장 걷는 모습도, 혀가 잘 안돌아 벙어리 시늉을 하는 모습도 심지어는 엄마를 찾으며 우는 모습까지도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처음엔 할머니란 말을 듣기가 조금 쑥스러웠지만 지금은 앉으면 손녀 자랑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주말에 손녀를 보느라 공원을 찾아 의자에 앉아 손녀의 재롱을 보고 있는데 아줌마 한 분이 다가 왔습니다. 말씨를 보니 저와 같은 탈북자였습니다. 그는 한참이나 손녀의 재롱을 보더니 눈에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처음엔 무슨 사연이 있는가 보다 하고 마음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자기 얘기를 꺼냈습니다.

함경도 종성이 고향인 그는 두 아이를 굶겨 죽였다고 했습니다. 1995년도에 이제 막 걸음을 떼는 젖먹이 아이와 소아마비로 자리에 누워 앓고 있던 7살짜리 아이가 자기 품에서 죽는 모습을 보고는 정신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이틀 만에 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먹을 것을 찾아 겨우 걸어서 길거리로 나왔다고 합니다. 아무리 두 눈을 크게 뜨고 길바닥을 살펴봐야 먹을 것은 하나도 없는데 ‘저 흙이 먹을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흙을 쌀로 만들 수는 없을까?’ 생각하며 멍하니 앉아 있는데 젊은 청년이 다가와 어디론가 가자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나섰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인신매매꾼에게 끌려 결국 탈북을 하게 되었고, 온갖 고생끝에 이곳 남한까지 오게 됐다고 했습니다. 비록 그 청년이 인신매매꾼이었지만, 남한까지 오게 한 그 청년이 고맙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제 손녀 덕에 제겐 또 한 명의 탈북자 친구가 생겼습니다.

상처 많은 그 친구와 저는 가슴 아픈 지난 추억을 잊지는 말고, 열심히 살아가자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긴 이야기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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