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 아직 쌀쌀하지만, 여성들의 옷차림과 꽃나무 줄기를 바라보면서 마음은 벌써 봄처럼 가볍습니다.
봄이 오는 요즘 저는 매일 아침 출근길 마음이 괜히 설렌답니다. 장롱 앞에서 오늘은 어떤 옷을 입고 출근할까? 이 옷은 좀 야한 것 같고 이것은 또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듯하고 이 옷은 너무 얇아서 추울 것 같고··· 고민이 이어집니다. 이럴 때면,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과 아이들이 웃으면서 아침이면 우리 엄마 때문에 더 분주하다는 둥 옷이 많아 걱정이라 둥 젊은 사람들보다 더 하다고 해가면서 저를 놀립니다.
한 때는 잘 먹고 잘 입고 땔 걱정 없이 사는 것이 제 인생의 유일한 소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제 제 소원은 이뤄졌습니다. 땔 걱정에 먹을 걱정은 안 하거든요. 영원히 잊어버릴 뻔했던 사랑하는 내 가족과 함께 세상에 부러운 것 없이 사는 오늘의 이 행복에 대해 저는 항상 감사합니다.
요즘 시집간 큰 딸애가 둘째를 임신해 입덧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아들 녀석이 큰 누나가 밥을 잘 먹지 못한다고 걱정을 하더니, 자기가 누나를 집으로 데려오겠다며 차를 끌고 큰 딸네 집으로 갔습니다. 자기들끼리 살갑게 챙겨주는 걸 보고 있으면 흐뭇합니다.
지금의 제 행복은 바로 이 아이들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굳센 마음으로 죽지 않고 버텨서 이곳까지 살아온 것도 다 아이들 덕분이었습니다.
며칠 전, 제 친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막 죽고 싶었는데···. 또 죽으려고 했는데 죽을 수가 없었어. 언니는 그 누군가를 위해 죽지 못한 기억이 있는가?' 제 친구는 얼마 전, 고향에 두고 온 늙으신 부모님이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11년 전인 1997년 3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제 갓 마흔이 넘은 한 여인이 쌀쌀한 대동강 바람을 맞으며 대동교의 철교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인의 눈에서는 괜스러운 눈물이 마치도 대동강 물과 함께 하염없이 내려 두 볼로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돈으로 10전이면 버스를 타고 대동교를 건널 수 있었지만, 이 여자의 주머니엔 단 돈 10전이 없었습니다.
대동교 철교 밑으로 금방 얼음에서 녹아 잔잔하게 흐르는 푸른 물이 언뜻언뜻 내려다보였습니다. 순간 그 여인은 대동강 철교를 뛰어내릴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발밑에서 흐르는 물속에서 아이들이 엄마를 부르며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는 장면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살자 가족이라고 아이들을 총대로 밀쳐대고 발로 차는 모습도 어렴풋하게 보였습니다. 아마 이 얘기를 남쪽 사람들에게 했다면 나약하다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방송을 듣는 여러분 중에서는 이 여인과 똑같은 생각을 해보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이 여인이 자살하려고 했던 무서운 공포증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배고픔의 설움!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배불리 먹일 수 없는 어느 어머니의 아픈 마음과 한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하는 주부의 마음. 죽음까지 생각하게 할 정도로 살기 힘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바로 제 모습이자, 고향의 많은 여성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내 고향 어디쯤에서 이 여인과 같은 어머니가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을 내려다보고 있을지 모릅니다. 며칠을 굶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동네 주민들이 잔등에 업어 병원으로 갔는데, 저혈압이라고 진단을 내려 주고 돌려보내는 내 고향의 의사들. 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고향 사람들의 소원은 저와 똑같이 '잘 먹고, 잘 입고, 땔 걱정 없이 사는 것'이겠지요. 언제쯤 그럴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저는 살아남으면 반드시 지금보다는 나아지는 날이 온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 저도 그날이 빨리 오기를 무엇보다도 간절히 빌고 또 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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