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아카시아 향에 실려 온 고향

벌써 아카시아 꽃이 활짝 펴, 온 동네가 향기로 가득합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친구와 동네 쉼터에 앉아 아카시아 꽃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추억했습니다. 주말이라 집안은 너무 답답하고 해서 동네 쉼터에 한 번 나왔는데, 마침 쉼터 앞엔 큰 아카시아 나무가 있어 옛날 얘기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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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어린 시절에 치마를 입고도 아카시아 나무를 그리 잘 탔건만, 지금은 돈을 주며 올라가라고 해도 몸이 말이 들을 것 같지 않다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저 역시 옛날엔 나무를 참 잘 탔습니다. 아카시아 나무는 습기가 많은 곳에 뿌리 없이 꺾어 심어도 워낙 잘 자라는 나무라 나무가 많지 않은 고향에도 아카시아 나무는 참 많았습니다. 또 숲이 우거지면 웬만한 병영은 위장하기에도 좋아 지방의 인민군 부대에서도, 군부대 주변에도 이런 아카시아 나무를 많이 심습니다.

그리고 아카시아 잎은 토끼들의 먹이로 주기도 하고 우리가 간식으로 먹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아카시아 나무에 올라, 한 보자기 뜯어 오면 저의 어머니는 하루 동안 물독에 담갔다가 꼭 짜서 밀가루에 섞어 시루에 찧어 주었습니다. 참, 어린 시절 그 맛은 별맛이었습니다.

제 친구는 고향이 지방이라 나무에 올라가 틀고 앉아 온종일 아카시아 꽃을 따 먹었다는데, 어머니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야 내려오곤 했답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왜 저 꽃잎을 그리 먹었을까? 토끼처럼 말이야"하는 통에 우리는 배를 끌어안고 웃었습니다.

쉼터 옆 자리에서 저희 얘기를 듣던 어느 할머니가 지금도 할머니 고향에서는 아카시아 꽃잎을 놓고 전을 해 먹는다고 거들었습니다. 우리는 의아했습니다. 이곳 남한엔 먹을 것이 많은데 왜 아직도 아카시아 꽃을 먹는가 말입니다.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지나간 옛 추억을 더듬기도 하고 꽃의 향기가 좋아서 먹는다고 합니다. 지금도 내 고향 사람들은 아카시아 꽃이 배가 고파 뜯어 먹는다지만 이곳 남한 사람들은 지나온 추억을 더듬기도 하고 향이 좋아서 먹는다니, 아카시아 나무 하나에서도 남북의 차이가 느껴집니다.

저에게는 아카시아 꽃 하면 이런 추억도 있습니다. 군에 갓 입대한 전사 시절이었습니다. 중대 특무장이 10월 10일이면 중대 군인들에게 토끼 곰을 해주어야 한다면서 토끼풀을 뜯어 오라고 했습니다.

중대 직일 근무를 서는 날이면 특무장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오전 상학이 끝나자 저는 자루 하나와 낫을 둘러메고 중대 뒷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굵은 가시가 있어 높은 곳엔 올라갈 수가 없어 낮은 곳에 붙은 아카시아 잎을 모조리 낫으로 쳤습니다. 잠깐 사이에 한 자루 채워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특무장이 뒷산에 올라가 나무를 보더니 최고 사령관의 명령을 위반했다며 저녁점검 시간에 저에게 구두 처벌을 줬습니다. 최고 사령관의 명령으로 군인들이 있는 병영을 하늘에서 쉽게 알아볼 수 없도록 아카시아 나무를 심었는데, 제가 모르고 잎을 모조리 쳐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갓 입대하자마자 특무장의 처벌을 받고 일주일이나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 어린 마음에 앞으로 군 생활 전부가 잘못될까봐 걱정이 됐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추억도 납니다. 아카시아 씨도 외화 벌이를 한답시고 당 조직과 학교들에서 많이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놈의 외화 벌이 때문에 아카시아 꽃씨를 줍느라 무력부청사가 자리 잡은 지당산에 올라갔다가 군인들에게 단속되어 동당 비서가 우리를 데리러 온 적도 있었답니다.

이렇게 지금 아카시아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는 오늘도 내 고향 주민에게는 아주 귀중한 존재입니다. 꽃으로는 모자라는 식량 대용이 되고 씨로는 외화벌이하고 나무숲으로는 인민군 부대 병영의 위장으로, 나무는 화목재로 사용하고 있답니다.

지금도 아카시아 꽃잎과 산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들로 헤매고 있을 우리 고향 사람들... 우리도 언젠가는 마을 쉼터에 늘어진 아카시아 나무를 보면서 꽃향기에 취해 옛날을 추억하는 날을 함께 살아갈 수 있겠지요. 아마 그때는 지금의 어려웠던 시절도 오로지 추억으로 남을 겁니다. 그날을 그려 보며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