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이순신 장군과 ‘아버지 장군님’

김춘애∙ 탈북 방송인
2010.06.30
myung_ryang_305 전남 진도대교 일대에서 '2009 명량대첩축제'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명량대첩 당시 수군과 왜군의 싸움이 재현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저는 얼마 전에 한반도 남쪽에 있는 섬인 전라남도 완도를 다녀왔습니다. 완도는 함북도 온성군 남양면 풍서동 유원진과는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사선으로 이어져 극남과 극북을 이른다고 합니다. 최남선의 조선 상식문답에 따르면 완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땅끝마을 해남에서 서울까지 1000리, 서울에서 온성까지 2000리를 헤아려 3000리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유래 되었다고도 합니다.

완도는 한자로 빙그레 웃을 ‘완(莞)자’와 섬 ‘도(島)’ 자를 써서, 고향을 생각하면 따뜻하고 포근한 감정이 솟구쳐 올라 빙그레 웃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저는 강연을 하기 위해 해안 경찰관들과 함께 배를 타고 완도 근처에 있는 섬인 학동리로 갔습니다. 우리는 먼저 노량대첩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안치했다던 충무사를 찾았습니다. 충무사는 맑은 공기와 소나무 숲 속에 자리잡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수백 년 전 이순신 장군을 안치했었다는 자리에는 이상하게도 풀 한 포기 없었습니다.

우리는 충무공 이순신의 구국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964년 건립한 사당과 명량대첩비, 충무공 영정이 있는 곳을 차례로 둘러봤습니다. 명량대첩비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 때인 1597년 9월 16일 울돌목에서 거둔 명량대첩을 기록한 비로, 숙종 14년 3월에 건립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명량대첩은 일제강점기 때 수난을 겪은 아픔이 있습니다. 1942년 전라남도 경찰부의 일본인 경찰 아베가 이 비를 뜯어내 서울로 옮기고 비각을 없앤 뒤 명랑대첩비를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파묻어 버렸습니다. 아마도 일제는 왜군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이순신 장군이 무척이나 미웠나 봅니다. 명량대첩비는 해방 후에야 수색 끝에 발견이 돼서 비가 원래 세워졌던 곳인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로 다시 돌아오게 됐습니다. 명량대첩비는 1965년에 보물 503호로 지정됐습니다.

충무사를 돌아보던 중에 저를 안내해 주던 해양경찰관이 북한에서도 이순신 장군을 장군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북한에서는 세상 밖에 태어나서 엄마, 아빠라는 말보다 ‘아버지 장군님’이나 ‘아버지 장군님 고맙습니다’,라는 말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해 줬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세뇌교육을 철이 들기 전부터 나이 50살이 넘도록 받아온 저로서도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점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두 시간씩 학생들에게 조선역사를 가르치고 있는데 을지문덕 장군과 이순신 장군에 대한 교육도 하고 있다고도 얘기해 줬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거북선을 만들어 바다를 지킨 용감한 장군이었다는 사실 말고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반면에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혁명역사에 대해서는 자다가 꿈속에서도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달달 외웠다고 말해 줬습니다.

어찌 보면 북한 주민들은 왜곡된 역사를 강제로 믿고 외우는 눈멀고, 귀까지 먼 장애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북한에서의 잘못된 교육 탓에 탈북청소년들은 남한에 와서 공부하면서 사회나 역사 과목을 제일 힘들어하고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존경스러운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돌아본 뒤 우리는 완도대교를 건너 다시 육지로 나와 숙소로 향했습니다. 숙소로 잡은 모텔은 참 아담하고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운동도 할 겸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맞으며 낚시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완도 부두를 거닐었습니다. 한반도 남단까지 와서 마침내 금수강산 삼천리를 다 가 보았다고 생각을 하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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