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학생들도 예외없이 농촌동원에 나서야 하는 북한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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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고 있는 동네는 이곳 남한에서 최북단에 있는 도시입니다. 우리 동네에서 내 고향인 평양까지의 거리는 약 230Km이고 개성까지의 거리는 서울 가는 거리보다도 더 가깝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온 또한 서울보다 약 3~4도 차이가 납니다. 따뜻한 남쪽에서는 이미 벚꽃축제가 끝났고 매실 꽃잎이 떨어지고 열매가 맺혔지만 이곳 파주에는 이제 한창 벚꽃이 활짝 피었을 뿐만 아니라 매실 꽃망울은 아직도 피지 않았습니다.

만발한 벚꽃이 활짝 핀 동네는 아름다운 것은 물론, 벚꽃 향기가 창문을 열면 솔솔 들어와 상쾌합니다. 눈부시게 찬란한 햇빛이 온 방안 기온을 따스하게 하는 아침, 창문 밖에서 아름답고도 낯익은 새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유난히 한 나무에서만 꽃 보라가 내리듯이 벚꽃 잎이 떨어지고 있었고 벌써 땅 위에는 소복이 쌓여 있었습니다.

조용한 나무 위에서 종달새 한 마리가 아름다운 목소리와 함께 활짝 핀 벚꽃 잎을 주둥이로 톡톡 뜯어내고 있었습니다. 뾰족한 주둥이로 꽃 꿀을 빨아 먹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괜스레 즐거운 마음으로 한참을 새의 재롱을 쳐다보았습니다. 종달새는 봄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새이면서 또 시끄러울 정도로 울기도 하고 분주한 새로 알고 있었거든요.

쉴 새 없이 부르는 종달새의 노래 소리와 잘 어울리는 벚꽃 잎의 꽃 보라에 문득 지난 날 막내동생이 자주 즐겨 부르던 노래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종달새 지종, 하늘에 날고 들에는 노랫소리, 알뜰히 가꾼 터전마다 기쁨이 넘쳐나네” 영화 주제곡이기도 합니다만 해마다 모내기철이면 모를 꽂으며 혹은 옥수수 영양단지를 옮기면서 콧노래로 불렀고 벌판에서는 흥이 나게 누구나 즐겨 부르는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종달새의 지저귐을 들으니 봄이 왔다는 것이 더욱 실감날 뿐만 아니라 지나간 추억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중학생이었던 막내 동생이 한창 옥수수 영양단지심기를 마치고 저녁 군중 문화 오락 시간에 직접 기타를 들고 이 노래를 불러 전교적으로 세 번 재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학교에서 노래하면 엄지손가락에 꼽혀 동생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어머님이 40대 중반의 나이에 출산한 막내딸이라 할머니 나이에 학부모가 되어 조금은 쑥스러워 했지만 그래도 늦둥이가 노래를 잘하는 탓에 조금은 위로가 되기도 했다고 어머님은 입버릇처럼 말했었거든요.

흥이 저절로 나는 노래라 한창 농장 일을 하다가 힘이 들면 이 노래를 부르면 춤판이 벌어지기도 했던 그 즐거웠던 시절이 이제는 먼 옛이야기가 되었네요. 언제인가는 식량 공급이 중단되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농촌 전투에 동원되어도 마치 전투에 나선 병사처럼 굳어지던 때도 있었습니다. 넓은 벌판에 선전대원들이 팔에 완장을 끼고 메가폰을 들고 힘찬 선전 선동과 함께 나팔과 북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노래 부르고 손에 빨간 깃발을 들고 춤을 추었지만 마냥 부담스럽기만 했고 불평불만이 가득 했었습니다.

이곳 남한 생활에 익숙해진 저로서는 텔레비전을 통해 요즘도 북한의 현실을 보면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어색해 보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도 텔레비전을 통해 북한 주민들이 영농 준비를 위해 퇴비를 실은 자동차와 트랙터를 앞세워 많은 시민들이 농촌을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너무도 낯익은 모습이었기에 조금은 마음이 짠하고 아프기도 했습니다.

노래처럼 북한의 벌판에는 과연 오늘도 흥이 나서 부르는 노래 소리가 자연스럽게 온 강산에 울려 퍼질까요? 노래 소리 역시 조직화된 하나의 선전선동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밥을 먹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무조건 농촌 전투에 동원되는 것이 원칙인 북한 사회에서는 꿈과 희망과 함께 공부에 열중해야 할 어린 꼬마 학생들도 봄철 농촌전투동원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꿈과 희망이 가득한 어린 학생들이 교실에서 희망과 꿈을 노래 불러야 하건만 그 연약한 체구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벌판에서 어른들과 함께 모를 심고 옥수수 영양 단지를 심어야 합니다. 화창한 봄날 아침, 종달새의 아름다운 노래 소리와 벚꽃 향에 만취되어 나도 모르게 지나간 고향에 대한 추억을 해 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