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화유적 대하는 남북의 차이

김춘애∙ 탈북 방송인
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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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원장 원용기)이 주최한 '천년을 이어온 힐링 축제'에 참석한 주한 외국인들이 31일 단종의 능인 '장릉'을 둘러본 뒤 능에서 내려오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원장 원용기)이 주최한 '천년을 이어온 힐링 축제'에 참석한 주한 외국인들이 31일 단종의 능인 '장릉'을 둘러본 뒤 능에서 내려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얼마 전에 저는 단종의 슬픈 역사가 깃들어 있는 영월군의 장릉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장릉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의 6대 왕인 단종의 능침으로 1970년 5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버스에서 내려 장릉입구로 들어가 보니 갖가지 색깔의 초롱이 줄에 달려있어 분위기는 마치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우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해설 강사님은 박충원 낙천 비각과 장판옥 앞에서의 주춧돌이 왜 돌이 아니라 시멘트로 만든 벽돌이냐며 우리에게 건축 부분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했습니다. 워낙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미인 저는 해설 강사님께 이전에 직업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더니 건축가였다고 대답합니다.

단종이 관풍에서 죽임을 당하였으나 모두들 세조의 후환이 두려워 주검을 거두는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영월 호장이었던 엄홍도가 한밤중에 몰래 시신을 거둬 산속으로 도망가다가 노루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곳에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고 합니다. 떳떳이 좋은 터를 골라 묻을 겨를이 없이 쫓기는 와중에 노루가 앉았던 터에만 눈이 쌓이지 않았기에 엉겁결에 땅을 파고 시신을 묻었을 뿐인데 풍수지리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단종의 묘가 자리 잡은 곳은 천하의 명당이라 합니다.

단종의 무덤은 중종 11년 노산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있게 될 때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중종 36년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현명에 따라 노산묘를 찾고 수축 봉제하였고 숙종 때인 1698년 비로소 왕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제야 묘의 이름도 장릉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엄홍도의 높은 충절 또한 인정이 되어 그의 자손들에게도 벼슬자리가 내려진 것은 물론 비록 죽은 뒤이지만 엄흥도에게는 공조참판이라는 벼슬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장릉은 조선 시대 다른 왕들의 무덤(능)과 비교해 몇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문화재로서 제항이 거행되는 조선 시대 왕릉은 장릉뿐이고 둘째는 조선시대 왕릉은 서울에서 1백리를 벗어나지 않은 곳에 두는 것이 관례인데 그 관례를 깬 유일한 왕릉이며 셋째로는 낮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는 다른 왕들의 능과는 달리 산줄기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넷째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이지만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는 점에서 경기도 여주 영릉인 세종대왕릉과 더불어 으뜸으로 꼽힌다고 합니다.

정조 15년에 건립된 이곳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성위32인 조사위198인 환관군 노위28인 여인위 6인을 합하여 264인의 위패를 모셔 놓고 해마다 한식날에 단종제향 후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장릉경내에 있는 배식단사의 한 위판을 차지하는 여인위에 6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도 합니다.

엄격한 유교 질서 사회에서 궁녀와 무녀를 충신배열에 올려놓는 다는 것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지만도 또 함께 모신다는 것은 더욱이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고 합니다. 짧은 생애를 마친 단종을 생각하며 나무 계단을 톱아 올라 드디어 왕릉으로 올랐습니다.

가쁜 숨을 들이 쉬느라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 야말로 산맥을 이루는 산줄기에 위치하고 있는 왕릉에는 아담하면서도 든든한 울타리가 있어 양쪽 산기슭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막아 주어 아늑하게 보였습니다. 잠간이나마 우리는 마치 산 정상에 오른 기분이기 들기도 했습니다.

잠시 동안 저는 단종의 왕릉을 보면서 문득 내 고향을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평양시 력포 구역에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무덤인 동명왕릉과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합장묘와 단군릉이 있거든요.

평강공주와 온달 장군의 합장묘는 오래 전부터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단군릉과 동명왕릉은 1990년 초에 발굴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추운 강추위에 손을 호호 불어 가면서 왕릉건설에 자주 동원되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주민들과 함께 매주 금요 노동으로 바께쯔와 소랭이 곡괭이 삽을 들고 땅 파고 돌 나르고 잔디 입히느라 빨갛게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북한 당국은 그렇게 많은 주민들을 동원시켜 왕릉을 만들어 놓았을 뿐 문화 탐방 답사나 견학을 조직하지 않습니다. 죽은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살아온 생애의 역사에 대해서는 세뇌 교육을 시키고 죽은 김일성이 있는 금수산 궁전은 1년에 두 번씩 주민들을 동원해 참관 시키고 있지만 문화 역사유적에 대해서는 주민들에게 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도 단군왕릉과 동명왕릉을 만드는데 동원은 되었지만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하기에 저는 이곳 한국에 온 지 10년이 지났지만 우리나라 역사 문화유적을 답사할 때마다 너무도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모르고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선조들에게 부끄럽기도 합니다. 하기에 저는 이번에 민속 박물관대학에 입학해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일이 너무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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