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실향민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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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실향민 어르신 두 분을 만나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어르신들은 80살이 훨씬 넘은 고령의 나이였습니다. 한 어르신의 고향은 함북도 무산이시고 또 한분의 고향은 함북도 청진이었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우연히 함북도 무산이 고향이신 그 어르신을 알게 됐고 친구들을 통해 북한에 있는 그분의 동생, 조카와 여러 번의 전화 연계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고 중국 두만강 연선에서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그때 당시에는 병으로 앓고 있던 친동생 대신 조카딸을 만나 경제적 도움도 줄 수 있도록 알선해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서 실향민이라고 하면 1945년 8·15광복과 함께 남북 분단,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해 고향인 북한을 떠나 자유를 찾아 월남한 후 남한에 정착한 북한 주민들을 존칭하는 개념으로 부르는 말입니다.

이들이 월남한 건 광복 직후와 6·25전쟁의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이런 실향민들도 고령이거나 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무엇보다 깊어집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내내 그분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뿐이었습니다. 북한에 두고 온 여동생들과 남동생들은 이제 겨우 60살이 넘은 나이지만 어르신들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가 이 세상에 없다고 하면서 한숨을 크게 쉬었습니다. 워낙 북한에서 대학을 나와 교사를 하시던 분들이라 이곳 대한민국에 와서도 젊은 시절을 교사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분들이었습니다.

종로거리가 옛날에는 아주 큰 부자들만이 다니던 거리였고 퇴근해서 친구들과 자주 술을 마시던 곳이라고 지나간 추억도 했고 또 고향에 대한 추억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한분은 고향은 청진이었지만 평양 김책 공업대학을 다니다가 전쟁이 일어나 청진으로 들어가셨다가 1·4 후퇴 때 이곳 남한으로 오셨는데 그때에는 젊은 혈기에 북한이 싫어서 정든 고향과 함께 사랑하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떠나왔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너무도 괴롭고 슬프다고 합니다.

80살이 훨씬 넘은 고령의 나이지만, 자식들을 키워 시집보내고 장가를 보내고 말년에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금 이 세상에 안 계시는 부모님이 너무도 많이 그립다고 합니다. 그 두 분은 저에게 자식들과 함께 이곳에 온 것이 너무도 큰 행복이라고 또 복 받은 여인이라고 힘을 주었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고향을 잊지 못해 눈물이 글썽한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잠시 잠깐 저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이 났습니다. 조금 지나면 또 한 살 나이만 듭니다. 두 분은 가는 세월과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합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분들이 정든 고향을 떠난 지 60년이 넘었습니다. 6번이나 강산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고향이 희미해져 잘 기억조차 안 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작년에 그 두 분이 중국에 가서 보니 흐르는 두만강 물소리는 변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두만강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먼발치에서 건너편에 있는 고향을 몇 시간 동안이나 말없이 바라보고 오니 그나마 조금 마음이 위로됐다고 말했습니다.

두 분의 얘기를 듣는 저 역시 남의 말 같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향을 떠나 온 지도 벌써 15년이 됐습니다. 다시는 고향에 가 볼 수 없다고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언제면 고향에 갈 수 있을까, 언제면 부모님 산소에 부모님이 생전에 좋아하시던 꿀에 묻힌 찰떡, 그리고 고추장과 오이에 소주 한잔을 부어 드릴 수 있을까...

과연 그날은 우리 세대에 있을까. 저는 그분들과 나 자신에게 읊조렸습니다. 그날은 얼마 멀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