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사돈집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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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이었습니다. 저는 출산하고 시집에 가서 산후조리를 하고 있는 딸과 손자가 몹시 궁금해 아침 일찍 전철을 타고 사돈집으로 갔습니다. 남한에 와서 두 딸을 시집보내고 사돈집을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남한 사람들이 사는 집을 방문하는 것도 역시 처음이었습니다.

사돈집은 크고 넓은 집이었습니다. 방이 4칸이나 됐고, 방이 모두 아담했습니다. 사돈집 생활을 보니 제 딸의 시집살이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안사돈은 손자가 너무 예쁘다는 둥, 딸이 없는 집안이라 며느리가 딸처럼 여겨진다는 둥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사돈 내외와 저는 지난 시절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사돈과 이런 대화는 처음이라 조금 긴장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는 지난 시절 북한에서 우리 아이들을 키우던 일들, 중국에서 아이들을 찾아 고생하던 일들을 얘기했고, 두 사돈은 옛날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던 많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안사돈은 친정집이 목포라 자주 갈 수 없었고,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시부모를 모시느라 마음고생도 없지 않아 있었답니다. 시부모는 실향민이어서 무척 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사돈은 많은 식구를 책임지는 가정주부로서 남편과 시부모를 공경하고 자식들 교육도 아주 착실히 해서 시부모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안사돈의 지난 시절 얘기를 들으며 돌아가신 시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자랑 같지만 저도 시어머님을 잘 모셨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생전에 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 늙은이 모시느라 고생이 많지, 내가 죽은 후 낮은 산에 묻어 다오, 산소에 올 때 높은 산에 오르느라 고생하지 말고..."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 시기 식량 사정이 긴박해지면서 하루 세끼 흰쌀밥을 드리지 못했고 탈북을 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을 지켜 드리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안사돈은 저와 얘기하는 중에 제 딸에게 시어머니가 빨래를 해도 못 본 척 하고 눈을 꾹 감고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의 눈에는 눈시울이 맺혔습니다. 안사돈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친 딸처럼은 아니더라도 정말 딸처럼 대해 주려는 모습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저는 딸이 병원에서 출산을 하고 시댁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젊은 시부모에 결혼을 아직 하지 않은 시아주버니가 있는 시댁에서 제대로 산후조리는 할 수 있을까? TV 연속극을 보면 이곳 남한에서도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나빠서 가정불화가 생기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아직 철없는 딸이 시어머니와 갈등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사돈집을 가보고는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사돈 내외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아주 좋은 분이었습니다. 저는 사돈집을 나서면서 딸에게 좋은 시부모이니 실망시키지 않도록 잘 모시고 며느리 구실을 잘 하라고 일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고향에 있었으면 딸을 시집보냈으면 이렇게 사돈집을 가볼 수 있었을까? 북한에 있을 때 제 부모와 시부모들은 평양 시내 가까이에 살면서도 제 결혼생활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한에 와서 두 딸을 출가시켰지만 큰 딸의 안사돈도 여러 번 만났고 작은 딸의 사돈들도 여러 번 만나고 지난 주말엔 집까지 가서 긴 얘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비록 남한에 친척이 한명도 없어서 외로울 때가 많지만, 그래도 자식들의 결혼으로 맺어진 인연이 생겨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언젠가 갈라진 조국이 하나가 되면 큰 딸, 작은 딸네 사돈 내외들을 고향에 모시고 가서 이름있는 옥류관 쟁반국수를 대접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