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용산 전쟁기념관 견학
김춘애∙ 탈북 방송인
2010.03.24
2010.03.24
사진-연합뉴스 제공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도 많이 내렸습니다. 봄비도 많이 내리는 것 같습니다.
아파트 마을에 있는 장미꽃 줄기들에는 벌써 물이 올라 있고, 양지쪽에 있는 개나리
꽃망울은 금방이라도 활짝 피어날 것만 같은데, 좀처럼 노란꽃이 활짝 피어나질 않습니다.
변덕스러운 봄 날씨 탓인가 봅니다.
며칠 전에도 날씨가 얼마나 고약스러운지, 비가 내리다가 이내 함박눈으로 변해 펑펑 내렸습니다. 이제 막 피어나려고 하는 개나리꽃이 추워서 얼지는 않을까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요즘 날씨처럼 봄이 와도 풀리지 않은 추위를 북한식으로 말하자면 ‘쌀쌀한 봄바람은 나뭇가지 눈을 틔워 준다’고 하는데, 이곳 남한에서는 꽃샘추위라고 부릅니다. 며칠 전 춘분이 지난 다음날에도 눈이 오긴 했지만, 이제 얼마 있으면 온강산에 아름다운 꽃잔치가 펼쳐질 것입니다. 산을 찾아 예쁜 꽃들도 보고, 그윽한 꽃향기를 맡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렙니다.
저는 얼마 전에 안보강사 강습을 마치고,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늦은 오후 시간이라 조금 쌀쌀하기도 해서 어떤 친구들은 도중에 집으로 가기도 했지만, 저는 전쟁기념관 견학이 처음이라 빠질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들을 전쟁기념관으로 안내해 준 분은 30년간 군대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한 연세 많은 분이었습니다. 마치 고향의 아버지를 보는 듯한 정겨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분의 해설을 따라 견학을 하던 중, 귓전에 뚜렷하게 들려오는 말이 있었습니다. 6.25전쟁은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은 북한공산군이 대한민국을 공산화할 목적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적으로 일으켰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전쟁 초기 북한은 T-34전차 242대, 자주포 176문 공군기 211대 등 많은 공격용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한국군은 전차는 물론 자주포를 비롯한 전투기 한 대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북한군은 우세한 군사력으로 작전개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했고 두 달도 채 안돼 낙동강까지 남진했다고 해설을 해 줬습니다.
낙동강 얘기를 듣는 순간 저는 이미 작고하신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에 참가했었습니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에 비극적인 6.25를 떠올리며 함께 싸우다 먼저 간 전우들과 생존해 있던 전우들에 대해 자주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때로는 생존한 전우들과 함께 약주도 드시며 먼저 간 그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군에서 제대해 사회생활을 할 때, 아버지께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학교에서 6,25전쟁은 덜레스가 38선 지역을 시찰한 뒤 전쟁을 일으켰다고 항상 배웠는데 어떻게 인민군대가 3일 만에 서울을 해방할 수 있었고 그렇게 빨리 낙동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저의 아버지는 어디에 가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시면서 원래 전쟁은 우리 북한이 먼저 일으킨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나기 며칠 전부터 전투 명령을 받은 모든 부대는 황해도 쪽으로 모든 군사 병력을 이동시켰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당시 군인이었던 아버지도 그 때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6.25전쟁은 일어났고, 낙동강까지 진격한 인민군대는 낙동강 도하에서 많은 군인들이 희생됐다고 했습니다. 낙동강 물이 핏물로 변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이 인천 앞바다로 들어와 다시 후퇴하는 도중 아버지는 총상을 입어 정치 공작원으로 활동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북한에 있을 때 평양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참관한 적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는 6.25 전쟁을 일으킨 것은 바로 남한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6.25는 남침 전쟁이라는 것을 온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도 북한 당국은 유치원생들과 각급 학교 학생들, 전체 인민들에게 거짓된 역사를 믿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 고향 주민들도 가까운 미래에 역사의 진실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며칠 전에도 날씨가 얼마나 고약스러운지, 비가 내리다가 이내 함박눈으로 변해 펑펑 내렸습니다. 이제 막 피어나려고 하는 개나리꽃이 추워서 얼지는 않을까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요즘 날씨처럼 봄이 와도 풀리지 않은 추위를 북한식으로 말하자면 ‘쌀쌀한 봄바람은 나뭇가지 눈을 틔워 준다’고 하는데, 이곳 남한에서는 꽃샘추위라고 부릅니다. 며칠 전 춘분이 지난 다음날에도 눈이 오긴 했지만, 이제 얼마 있으면 온강산에 아름다운 꽃잔치가 펼쳐질 것입니다. 산을 찾아 예쁜 꽃들도 보고, 그윽한 꽃향기를 맡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렙니다.
저는 얼마 전에 안보강사 강습을 마치고,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늦은 오후 시간이라 조금 쌀쌀하기도 해서 어떤 친구들은 도중에 집으로 가기도 했지만, 저는 전쟁기념관 견학이 처음이라 빠질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들을 전쟁기념관으로 안내해 준 분은 30년간 군대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한 연세 많은 분이었습니다. 마치 고향의 아버지를 보는 듯한 정겨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분의 해설을 따라 견학을 하던 중, 귓전에 뚜렷하게 들려오는 말이 있었습니다. 6.25전쟁은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은 북한공산군이 대한민국을 공산화할 목적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적으로 일으켰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전쟁 초기 북한은 T-34전차 242대, 자주포 176문 공군기 211대 등 많은 공격용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한국군은 전차는 물론 자주포를 비롯한 전투기 한 대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북한군은 우세한 군사력으로 작전개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했고 두 달도 채 안돼 낙동강까지 남진했다고 해설을 해 줬습니다.
낙동강 얘기를 듣는 순간 저는 이미 작고하신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에 참가했었습니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에 비극적인 6.25를 떠올리며 함께 싸우다 먼저 간 전우들과 생존해 있던 전우들에 대해 자주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때로는 생존한 전우들과 함께 약주도 드시며 먼저 간 그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군에서 제대해 사회생활을 할 때, 아버지께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학교에서 6,25전쟁은 덜레스가 38선 지역을 시찰한 뒤 전쟁을 일으켰다고 항상 배웠는데 어떻게 인민군대가 3일 만에 서울을 해방할 수 있었고 그렇게 빨리 낙동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저의 아버지는 어디에 가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시면서 원래 전쟁은 우리 북한이 먼저 일으킨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나기 며칠 전부터 전투 명령을 받은 모든 부대는 황해도 쪽으로 모든 군사 병력을 이동시켰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당시 군인이었던 아버지도 그 때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6.25전쟁은 일어났고, 낙동강까지 진격한 인민군대는 낙동강 도하에서 많은 군인들이 희생됐다고 했습니다. 낙동강 물이 핏물로 변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이 인천 앞바다로 들어와 다시 후퇴하는 도중 아버지는 총상을 입어 정치 공작원으로 활동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북한에 있을 때 평양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참관한 적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는 6.25 전쟁을 일으킨 것은 바로 남한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6.25는 남침 전쟁이라는 것을 온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도 북한 당국은 유치원생들과 각급 학교 학생들, 전체 인민들에게 거짓된 역사를 믿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 고향 주민들도 가까운 미래에 역사의 진실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