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보는 한반도 역사]④ 연개소문∙ 김유신에 대한 인물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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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덕 연구원: 북한이 통일신라는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 남쪽에서의 역사는 최초의 통일국가를 신라로 보는데 북한에서는 고려라고 본다.

안녕하세요? 바로 보는 한반도 역사, 이규상입니다.

지난번 시간에 소개해 드렸듯이 남과 북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평가도 각각 달리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고, 신라는 대동강 이남에서만 통일을 이뤘기 때문에 진정한 통일이라고 할 수 없으며 진정한 민족최초의 통일은 고려라는 주장입니다.

반면에 남측에서는 삼국통일이 외세의 협조를 얻었다는 점과 지리적으로도 불안정한 통일이었지만, 삼국통일은 민족문화발전에 큰 공헌을 했기 때문에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역사의 주인공들에 대한 남북한의 평가는 어떻게 다를까요?

오늘 <바로 보는 한반도 역사>에서 살펴봅니다.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2대 손인 김유신 장군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으로 남쪽에서는 오늘날 까지도 존경받는 인물로 꼽히고 있습니다.

신라가 아닌 가야의 핏줄을 받았다는 이유로 김유신은 당시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되었습니다.

609년 김유신은 화랑이 되었고 여동생을 김춘추와 혼인하여 권력을 얻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습니다.

김유신은 신라 진덕여왕 이 죽은후 왕을 이을 사람이 없자 김춘추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삼국통일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김유신과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고 이후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해 결국 고구려까지 멸망시켰습니다.

신라와 함께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를 차지한 당나라는 신라의 영토까지 넘보았지만, 신라는 김유신 장군의 지휘아래 당나라를 공략해 한강 이북의 옛 고구려 땅에서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이루게 되고 오늘날 남쪽에서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북쪽에서는 김유신을 김춘추와 함께 민족의 배신자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가 발간한 ‘조선통사’는 신라와 김유신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신라의 봉건 통치배들은 당나라 침략자까지 끌어들여 국내에서 오래 동안 전쟁을 벌림으로써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았으며, 남에게 의존하여 남의 힘을 빌려 자기 나라의 내부 문제를 해결하려 하며 그 덕에 잘살아 보겠다고 하는 것은 사대주의 사상에 물젖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북한의 신라와 김유신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현재의 남북분단과 한미동맹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특히 북한은 신라통치계급이 당나라의 힘을 빌려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반민족 행위라며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의 이러한 통일신라에 대한 부정은 한반도의 역사가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고구려에서 발해로 또 발해에서 고려로 이어졌다는 북방중심역사의 전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과 부합된다고 통일연구원 이교덕 연구위원은 말합니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면 북방중심의 역사. 북한이 지리적으로 북쪽에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의 뿌리는 북쪽에 있었다. 북한정권의 역사적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삼국의 역사가운데서도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고구려이다. 고구려가 상무정신이 강하고 사대주의가 없었던 나라였고. 우리나라 역사상 정치적 군사적으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기 때문에 고구려 사에 나타난 인물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긍정적이고 반대로 백제와 신라에 대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교덕 연구원이 말했듯이 신라의 김유신 장군에 대한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고구려 사에 등장하는 연개소문에 대한 북한 역사책의 평가는 긍정적입니다. 사회과학연구원이 발간한 조선통사에는 연개소문이 고구려집권층의 투항주의적인 당나라에 대한정책에 반대하여 나선 귀족의 한사람 이었다고 나왔습니다.

또 조선전사 3권에서는 그가 일으킨 무장정변, 즉 영류 왕과 온건계열 친당 파를 숙청한 것은 봉건 지배층 안에서 벌어진 정권 쟁탈전 이였던 만큼 비록 지배계급의 계급적 제한성을 극복 할 수 없었지만 고구려역사발전에 긍정적인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전사는 또 연개소문이 죽은 것은 훌륭한 지휘자를 잃은 것으로 고구려의 큰 손실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남한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연개소문을 독립자주 정신과 대외 경쟁에서 대단한 지략을 보인 우리 역사상 제일인자‘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대내적으로 독재 정치를 단행한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다시 이교덕 연구원의 말입니다.


“내부적으로는 독재적인 성격이 있어서 부정적이었지만 그래도 나라를 군사강국으로 부강하게 키웠다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김유신과 연개소문은 동일한 시대를 살아온 역사적 인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의 이들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다릅니다.

그렇지만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남과 북의 해석이 모두 다 다른 것은 아닙니다.

거란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강감찬 장군이나 왜구의 침략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에 대한 남북한의 평가는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교덕 연구원은 남과 북이 분단 된지 5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이 같이 존경하는 민족사 인물이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고 말하고, 남과 북이 함께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들을 찾아내는 것이 남북한 주민들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의미 있는 접근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보는 한반도 역사 진행에 이규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