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8년 5월 요동정벌에 나섰던 고려장수 이성계는 고려 우왕의 명을 어기고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평양으로 돌려 고려의 명장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했습니다. 이 사건은 바로 '위화도회군'으로 한반도에 조선이 서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 됐습니다. '바로 보는 한반도 역사' 오늘은 '위화도회군'과 이성계에 대한 남과 북의 평가를 살펴봅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매국 배족의 역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성계를 자기의 지위가 높아지자 고려정권을 빼앗을 음흉한 계책실현의 유리한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으며, 요동원정의 기회를 타 고려의 정권을 가로챈 인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 북한사회과학원이 발간한 조선통사를 보면,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가로채는 비열한 반역행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남한의 역사학계는 이성계에 대한 인물에 대해 두 가지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이성계를 조선 제1대 왕을 지낸 인물로 고려의 우왕을 폐하고 막강한 권력으로 전제 개혁을 단행하였고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여 조선을 세우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성계는 또 사대주의와 배불숭유, 농본주의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조선 500년의 근본정책을 이루었고, 관제의 정비와 병제, 전제의 재조정 등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의 김한종 교수는 태조 이성계의 업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김한종: 왕이 되기 전에 시행한 것이지만 가장 큰 것은 과전법이 있다. 이성계가 태조로 즉위하기 직전에 시행한 것이지만 실제로 조선 건국의 기초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계의 모든 면을 좋게 평가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의 김한종 교수의 말입니다.
김한종: 이성계나 위화도 회군에 대한 평가는 통일되어 있지 않다. 엇가리고 있다는 말이다. 한쪽에서는 당시 고려 말기 민중들의 의견과 사회분위기를 반영한 것이 위화도회군이라고 말하는 쪽도 있는 반면 위회도회군은 이성계가 권력을 잡기위한행위로 보는 시각도 있다.
위화도회군은 앞서 말했듯이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 1388년 5월 요동정벌에 나선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한 사건입니다. 고려의 우왕이 즉위한 뒤 고려의 우방은 명나라에서 원나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가 악화되자 명나라는 1388년 3월 쌍성총관부 관하지역을 영유하기위해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고려에 통고했습니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최영 장군이 중심이 되어 명나라의 대 고려 전진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의견이 제기 됐습니다. 최영 장군 수하에 있던 이성계는 처음부터 요동정벌에 반대했지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르게 됐습니다.
이성계는 그곳에서 진군을 멈추고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 하고, 요동을 공격하는 동안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우왕에게 회군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평양에 있던 우왕과 최영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이성계는 회군을 결정하고 군사를 이끌고 다시 고려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성계는 회군해 오는 정벌군과 싸우려는 최영 장군을 붙잡아 처형하고 우왕을 강화도로 쫓아냈습니다. 남한의 역사학자들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두 가지 시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김한종 교수의 설명입니다.
김한종: 약간 견해는 엇갈리기는 하지만 위화도회군이 우발적이라고 보는 견해는 많지 않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의 계획적인 군사행동... 이렇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성계의 권력욕심... 이런 쪽에 초점을 맞춘 견해도 있는 반면 그 당시 사회의 어려운 농민들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반영했다 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 위화도회군 과정에서 이성계에게 폐한 최영 장군에 대한 북한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입니다. 북한의 조선통사는 "최영 장군이 비록 세신대족 출신이었으나 대농장주들을 반대하여 투쟁해왔으며 외적을 물리치는 100번도 넘는 전투에서 항상 용감하게 싸워 이긴 신망 있는 사람 이였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최영 장군에 대한 이런 평가는 남한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김한종 교수의 설명입니다.
김한종: 남쪽에서도 최영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이 긍정적이다. 최영이 요동정벌이 있기 전에 고려말에 횡포를 부리던 다른 검문세족을 제거했다거나, 그의 청념결백한 성품 등을 강조하는 분위기 이다. 그래서 최영 장군 인물에 대해 긍정적이다.
북한의 이성계와 최영에 대한 엇갈린 인물 평가는 북한 정권의 역사적 전통성 찾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견해입니다. 북한은 줄 곳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고구려에서 발해 그리고 고려로 이어지는 북방정권을 민족사의 적통국가로 평가해온 반면 신라와 조선은 외세에 의존한 사대주의 정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