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한국인] 노르웨이 라면 왕 이철호씨①-한국전쟁이 바꾼 인생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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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오슬로시 비켈란드 조각공원에서 이철호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RFA PHOTO
노르웨이 오슬로시 비켈란드 조각공원에서 이철호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RFA PHOTO RFA PHOTO
세계를 빛낸 한인을 세세히 보면 ‘근면성과 진취적인’ 삶을 살아가는 한민족의 기상을 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세계인들은 ‘한국인의 근면성’을 자주 칭찬한다. 그것이 바로 세계의 한국인이 성장해가는 삶의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북유럽 노르웨이에는 2명의 왕이 있다는 말이 있다. 한 명은 노르웨이 국왕이고 또 한 명은 '라면 왕' 이철호 씨다. 미스터 리! 라는 라면왕의 이름은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인간승리와 성공의 상징이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전쟁고아에서 노르웨이에서 유명한 요리사로, ‘미스터 리’ 상표의 라면 왕으로 입지전적인 노르웨이 한국인 이철호 씨의 인간승리 1부를 함께한다.

이철호 씨가 사는 노르웨이는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서쪽에 있는 산과 호수의 나라요, 해운 왕국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르웨이는 산유국으로 일 인당 국민 소득 2만 7천 달러의 사회보장제도가 잘 된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 국가이다. 인구 400만으로 단촐하지 만 바이킹 후예들로 평온한 삶을 구가하는 이 씨의 아름다운 제2의 고향이다.

한국전쟁 중 하우스보이에서 노르웨이의 유명한 요리사, 뷔페식당 사장, 식품관련 공장장 등 인간승리의 삶을 살아온 이철호 씨의 이야기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전쟁의 비참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씨의 고향이야기다.

이철호:옛날의 고향이 그립고 참 좋았었는데, 농촌이고 산도 많고 풀밭도 많고 농사짓는 것이 다 없어졌더라고요. 지금은 큰 빌딩만 들어서 어느 큰 도시나 마찬가지여서 가봐도 고향 기분이 안 나요. 옛 고향이 그립지요. 꿈속의 고향이 좋아요.

이철호 씨의 인생역정은 이렇게 시작한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씨가 머나먼 노르웨이에 가게 된 것은 따지고 보면 전쟁 탓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 이씨는 열 세 살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은행에서 돈을 찾아서 가족들에게 고루 나눠주며 혹시 전쟁통에 헤어지더라도 이 돈으로 끝까지 살아남기를 바랬다. 그리고 이씨는 피난길 와중에도 밀짚모자 장사와 냉차 장사 등을 하며 연명했다. 그러다가 전쟁 중에 우연히 알게 된 미군 병사와의 인연으로 미군부대에 하우스보이(미군들의 잔심부름 하는일)로 들어갔다. 워낙 싹싹하고 성실했던 그를 미군들은 아껴줬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폭격을 맞아 다리 한쪽을 부상당했다 야전병원을 전전하며 수술과 치료를 거듭했지만, 다리의 상처는 더욱 악화되었다. 평소 똑똑하고 정직한 이씨를 아끼던 당시 해병대 사단장인 월터 스나이더 장군은 이씨를 좀더 좋은 의료진에게 보이고 싶어 미국 군인신문에 광고를 내 주었다. 그 광고를 보고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등지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뜻을 보내왔고, 결국 노르웨이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이씨의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철호: 6 25때 제가 미군부대 쫒아다니다가 부상을 당했어요. 그래서 야전병원이란 병원은 다 다니다 보니까 마지막에 노르웨이 야전 병원에 (의정부에 있던) 입원하게 됐어요. 그래서 노르웨이 사람들을 처음으로 알게 된 거지요. 저를 수술하던 박사님이 파워스 박사라고 참 아주 굉장한 박사더라고요. 그분의 이야기가 너는 한국에 있으면 도저히 살 가망이 없다고, 병원설비가 잘 된 나라로 가야지만 살 거라고 그분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또 제가 미군 장교 월터 스나이더씨라고 해병대 제일 높은 사람 밑에 있었거든요. 그분이 그 소리 듣고서 바로 추천해줘서 신문에 냈던 가 봐요. 신문에 내 저를 살려줄 만한 병원이 있는가 (세계에) 그래서 노르웨이 병원의 초대를 받았어요. 자기들이 살려줄 가능성이 있다고 그래서 저를 치료하시던 파우스 박사님이 자기도 얼마 안 있으면 노르웨이 가니까 그 병원에서 직접 치료해 주겠다고 그래서 그분 따라서 노르웨이에 들어왔어요.

이철호 씨는 7년간 수십 차례에 걸친 수술로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그는 노르웨이에 남기로 결심하게 된다. 구두닦이가 하나도 없는 노르웨이에서 구두닦이를 하면 성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씨는 구두닦이 준비를 위해 부지런히 노르웨이 말을 배웠다고 한다.

이철호: 제가 노르웨이 땅을 밟았을 때가 1954년도 였었거든요. 그때 노르웨이도 세계 2차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노르웨이가 (스칸디나비아지역에서는) 제일 가난했던 나라예요. 그 당시 감자도 깍지 않고 먹었어요. 깍으면 살이 베껴나가니까 몹시 가난한 나라에 제가 왔었어요. 그런데도 노르웨이에서 살고 싶었던 이유는 노르웨이에 오니까요 노르웨이에 구두 닦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한국서 제가 구두를 잘 닦았거든요. 여기서 구두 닦기 시작하면 엄청나게 돈을 벌 것 같은 기분을 느꼈어요. 그래서 구두를 닦게 되면 노르웨이 말을 첫째 배워야 될 거다. 그래 열심히 배웠습니다. 제가 노르웨이 말 배우는데 3개월에 다 배웠어요.(병원 침대에서 다 배웠어요. 간호사하고 청소하는 분 의사들에게 모르는 단어 물어보고 설명해 달라고 해서 배웠어요.)

이철호 씨는 요리사가 되기 전까지 살아 남기 위해 호텔식당을 찾아가 부엌청소부로 시작해 요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는 등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걷게 된다. 공짜로 요리학교까지 졸업하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철호: 노르웨이도 가난한 나라고 돈도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때는 사회보장제도가 안 되어 있었어요. 그때만해도. 그래서 제가 제 손으로 아픈 발에다가 화장실 청소까지 해가며 별일을 다 했지요. 배가 엄청나게 고팠어요. 배가 고팠을 때 어디 가서 밥을 얻어 먹을 데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호텔 식당 같은데 가면 밥을 얻어먹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제가 호텔 식당의 부엌 청소부로 들어갔어요. 거기서 청소를 잘해 줬지요. 그랬더니 주방장이 나를 굉장히 칭찬해 주면서 저에게 요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공짜로 요리를 배웠어요. 운이 좋아서 학교까지 보내줘서 요리학교 4년을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나왔어요.

이철호 씨는 하늘이 도왔을까? 그는 스위스에서 요리공부를 하는 행운도 얻게 된다.

이철호: 노르웨이 요리학교에서 장학금을 줘서 프랑스에 가서 더 공부하라고 장학금을 타 가지고 프랑스 갈려고 했는데, 프랑스에 제가 가고 싶었던 것은 프랑스 가면 프랑스어를 공부해야겠다. 그런 욕심이 있었다고요. 어떤 분이 프랑스 가지 말고 스위스에 가면 프랑스 말을 정확하게 더 잘한다고 해요. 제가 바꿔서 스위스로 갔어요. 스위스로 가서 프랑스말을 배웠어요. 하여튼 저도 별일을 다 했습니다.

언어도 유창하지 못하고 신체적으로도 장애를 가진 이씨가 낯선 이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유일한 방법은 한가지, 그것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보다 서너 배의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바로 이민자로서 이철호 씨의 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철호:
제가 호텔 학을 공부한 이유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생각이 ‘나는 외국사람’이기 때문에 여기서 서비스 관련 전문인이 되면, 서비스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로 생각했고, 구두 닦는 것도 서비스니까. 구두닦기 위해서도 학교에 다녀야 했어요. 제가 한국에서 학교를 못 다녔기 때문에 여기서 중학교 고등학교도 나왔고 상업대학도 나오다보니 면허를 얻게 됐거든요. 구두 닦는데 면허가 없으면 못 닦아요. 그리고 세금관계라든가 이 나라 법을 다 알아야지만 구두 닦는 영업도 할 수 있어요. 그 면허를 얻다 보니까 제법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처음에 구두닦기 면허시험에서 낙방 됐어요. 참 억울하더라고요.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해 가지고 구두 닦는 게 저한테 미안하더라고요. 이왕이면 조금 더 공부해서 다른 대학을 나오겠다고 해서 호텔대학을 나왔어요.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되더라고요.

이철호 씨는 서서히 꿈을 이뤄 나갔다. 그리고 이씨의 삶은 더는 남루한 이방인의 삶이 아니었다. 그는 10년 동안 마음을 주고받은 독일여성 아네리스와 결혼해 세 자녀를 낳아 꿈에 그리던 가정도 이뤘고 최고급 호텔 주방장에서 노르웨이의 대형 빵 공장의 총지배인으로 22년의 삶을 살아간다.

이철호: 노르웨이의 멜 하우슨이라고요. 스캔디나비안에서는 제일 큰 PASTRY 하고 빵 공장이었어요. 멜 하우슨은 맨 처음 170년전에 독일서 올라온 할아버지들이 시작 했는데 제가 그 당시 식당도 개발해서 15개군데 식당도 만들었어요. 식당 지점인 체인을 만들었어요. 빵도 굽고 과자도 굽고 케이크도 만들고 했는데 거기에 모든일을 책임지고 통솔하는 매니저로 있었어요. 68년부터 89년까지 일하고 그 후로 라면을 시작한 겁니다.

그렇다고 이철호 씨의 인생에 늘 화창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세 딸을 낳아주고 가장 든든한 조력자인 아내 아네리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맛보았고, 엄청난 노력과 투자를 들여 시작한 인삼 차 사업이 실패한 경험도 가졌다. 그러나 지금의 이씨에게 가장 보배로운 것은 가족으로 23년 전 재혼한 누구보다 그를 가장 잘 이해하고 도와주는 아내 이씨와 엄마가 없던 때 아버지와 함께 잘 자라준 세 딸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이철호:
제가 스위스에서 공부할 때 독일 여자를 만났어요. 그분은 일찌감치 돌아가셨지만 20년을 같이 살면서 딸만 셋 낳았어요. 아들 좀 낳으려고 했더니 안되더라고요. 큰딸은 의사이고 둘째딸은 큰 식당을 운영하고 셋째는 언론인입니다. 딸만 셋인데 다들 잘 살아요.

이철호 씨는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세계 한인에게 성공의 비결은 ‘자기 계획을 세워놓고 계획대로 꾸준히 일하라’라고 당부한다.

이철호: (한국 속담도 있잖아요. 10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것,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것)한국에 좋은 속담 많더라고, 그래 열심히 노력하면 되지 않는 일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뭐가 되고 싶다면 노력하면 다 된다고. 그러니까 너무 큰 것 바라지 말고 조그만 것 바라서 계단 올라가는 식으로 한층식 올라가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한 계단식 올라가라고 너무 큰 것 바래서 열 계단 한꺼번에 가려면 넘어지니까.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전쟁고아에서 노르웨이의 유명한 요리사로, ‘미스터 리’ 상표의 라면 왕으로 입지전적인 노르웨이 한국인 이철호 씨의 인간승리 1부를 함께했다. 다음 시간에는 노르웨이에 라면을 보급하는 일과 노르웨이에 해산물 대학교를 추진하는 이철호 씨의 인간승리 2부를 함께한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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