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한국인] 뉴욕 예술가곡 연구회 서병선 회장 (1)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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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뉴욕효신장로교회에서 열린 탈북난민돕기 모금음악회.
2008년 뉴욕효신장로교회에서 열린 탈북난민돕기 모금음악회.
사진제공-뉴욕예술가곡연구회
한국 경기도의 한 산기슭 벽촌 농가 마을에서 태어나 뉴욕 줄리아드 음악학교까지 와 가곡 보급의 중요성을 깨닫고 가곡 보급에 심혈을 기울여오고 있는 일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사명이란 생각이 든다는 한인 1세 음악인 테너 서병선 씨, 그의 가곡 사랑은 대단하다. 정직, 소박, 지성, 인내, 사랑 등 정신적 영양소를 지닌 노래라고 말한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곡이 날로 시들어가는 직접적인 큰 원인은 오페라의 범람에 있다고 말한다. 오페라의 소리는 흥분하기 쉽고 쾌락적인 요소도 많아 비문화적인 소리라고 꼬집는다. 서울음대, 줄리아드 음대, 이태리 로저리 예술 대학원 수료, 뉴욕 링컨센터 앨리스 털리 홀 3회 독창회로 뉴욕타임스, 뉴욕데일리뉴스에서 동방에서 온 빛나는 테너, 영혼의 목소리라고 격찬했다. 그리고 뉴욕예술가곡연구회 회장으로 현재 뉴욕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뉴욕 예술가곡 연구회 서병선 회장 (사진제공:서병선)
뉴욕 예술가곡 연구회 서병선 회장 (사진제공:서병선) 사진제공:서병선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전 세계를 상대로 가곡 보급에 큰 꿈과 용기로 전진하는 뉴욕에 사는 테너 서병선의 꿈과 야망의 세계 1부를 함께한다.

서병선 씨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서병선 씨가 태어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는 전기도 버스도 없는 벽촌 마을이었다. 너덧 마지기의 논과 손바닥만 한 텃밭을 일궈서 6식구가 먹고 살았단다. 4 남매가 배가 고파 엉엉 울면 어머니는 밥 달라고 우는 자식들 앞에서 울지도 못하시고 가난의 슬픔과 고난을 참으시며 입술을 깨물곤 하셨단다. 어려운 시절 어느 친척이 보리 한 말을 갖다 주었는데 얼마나 고마웠던지 서병선 어린이는 그를 천사로 생각했다. 서병선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서병선: 제가 태어나고 자라난 곳은 경기도 광주군으로 그때 당시는 벽촌 마을이었습니다. 제가 자라던 곳은 전기도 없고, 자동차 버스도 없어 걸어 다녀야 하는 두메산골이었지요. 그래서 봄이 되면 뒷동산에 가서 흐르는 물과 노는 등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서병선 씨의 음악에는 이렇듯 뒷동산의 맑은 물과 자연이 함께한 배경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렇게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헌신으로 길러주신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잊지 못한다.

서병선: 그 당시는 대부분 가난했지만, 특히 저희는 엄청 가난해서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 굶고 끼니를 넘기느라 배가 끊어지는 것 같이 아플 때가 두 번 있었는데 그 당시 그 고통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됩니다. 그런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머니의 헌신과 극진한 사랑이 아니었으면 학교에 갈 희망도 없었고, 어머님이 그 어려웠을 때 길가에서 과일도 팔고, 국수도 말아 팔고, 아주 고생하시면서 저희를 교육하셔서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은 표현할 길 없이 참으로 크고 높습니다.

서 씨는 먹고살기도 어려운 가정에서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었을까? 어머니가 남의 집 논밭에서 닥치는 대로 일해 얻은 품삯으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생각하며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으로 내려가 야학을 시작한다. 가난하여 초등학교도 못 다니는 불쌍한 애들을 모아 초등학교, 중등학교 과정을 가르치게 된다.

서병선: 학교는 제가 말죽거리에 있는 언주 초등학교에 다녔고, 중학교를 가야 되는데 제 실력으로 서울 중학교에 갈 수 없고, 시골에 마침 남녀공학 은광중학교가 생겨 졸업했습니다. 그리고서 고등학교를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경신고등학교를 갔지요. 경신고를 졸업하고, 어느 날 우연히 (제가 어린이를 사랑해서 어린이들이 저희 집을 놀러 오곤 했어요. 시골에서도) 그때 너무나 가난해서 초등학교도 졸업 못 하는 어린이들이 그 당시는 많았어요. 낮에는 들판에 나가서 부모의 일을 도와야 하는 그런 어린이들, 한글도 아직 모르는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 야학당을 시작하게 됐지요. 아주 참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저희 가슴속에 우러나서 평생 야학당을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한때도 그때였고, 그때 참 인간사랑도 배우고, 많은 배움을 가졌습니다.

서병선 씨가 야학생과 함께한 추억을 들어보자! 당시 제자 중에는 지금도 스승의 날에는 감사의 편지를 보내 온단다.

서병선: 처음에는 사랑방에서 시작했는데 이웃 마을에서까지 소문을 듣고, 50명으로 늘어났어요. 50명의 학생이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고, 배움을 갖는다는 것은 그 어린이들에게 참 희망과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소가 좁으니까 봉은사로 찾아가서 사정하니까 거기서 주지 스님이 스님들이 자는 넓은 방을 빌려 거기서 야학당을 했지요. 야학당을 하면서도 제일 추억이 되는 것은 인간의 인격, 정신, 이것이 교육의 가장 으뜸이라고 생각돼서 그 당시 톨스토이가 편저한 인생독본에서 페스타로치, 아브라함 링컨, 간디, 석가, 공자 등의 가르침을 일일 일언 이라해서 흑판에 써놓고 매일 가르쳤습니다. 물론 학생들에게는 어려운 수준이었지만 쉽게 풀이하여가며 가르치니 선각자들의 가르침이 뼈가 되고 살이 되는 큰 교육적 효과를 거두었어요. 가르치는 나에게도 큰 감동을 받는 귀한 시간이 되었어요.

서병선 씨와 야학 시절의 함께한 제자들의 이야기 계속해서 들어보자! 지금은 사회에서 우수한 사회인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서병선: 특히 야학당 시절에 정종식이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머리가 천재더라고요. 그런데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거예요. 그래 제 모교인 은광 중학교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서 (지금 생각하니 수십 번 찾아갔나 봐요) 그래서 그 학생을 학교에 넣고, 중학교를 졸업해서 검정고시를 합격하게 하고, 제가 다니던 학원에 취직을 시켜서 대학까지 나와서 지금은 사장이 돼서 잘 살고 있습니다. 아들 딸들 잘 키우고 그래서 그렇게 고마워해요. 그것이 참 큰 추억이고, 조유진이라는 학생도 참 머리가 좋은데 지금도 수십 년 동안을 청담동 정육점을 경영하는데 제가 한국에 가는 때마다 우리 선생님 오셨다고 고기를 싸다주면서 오래 사셔야 한다고 그리고 매번 편지를 보내주고 스승의 날이면 국제전화를 해서 고마움을 전하는 이런 잊지 못할 추억들이 많습니다.

서병선 씨가 벽촌에서 천재 음악도가 다니는 세계제일의 명문 뉴욕 줄리아드 음대에 유학까지의 길목에는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의 덕분이라고 설명 한다.

서병선
: 제가 그렇게 가난한 속에서 라디오도 없으니까 클래식 음악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지요. 그래 고등학교 때 음악 선생님께서 제 목소리가 좋은 걸 어떻게 아시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교내 콩크르가 있는데 저에게 콩클대회에 한번 나가보라고! 지도도 무료로 해 주겠다고, 그래서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을 접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나갔는데 조희경이라는 학생이 성가대 생활도 오래 했고, 거룩한 성을 잘 불러 1등을 하고, 스페인 민요 아이 아이 아이를 내가 불러 2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이 내 소리가 더 아름답고 좋고 1등 자격이 있다고 격려해 주셨지만, 그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접할 기회를 얻었지요.

서병선 씨가 서을 음대에 입학하기까지는 형님의 지원 덕분이었다고 고마움을 전한다.

서병선: 제대를 하고 나서 뭘 할까 이렇게 생각을 했을 때 음악을 공부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뭐 음악대학을 가려면 렛슨도 해야 하고, 기본 실력을 닦아야 되는데 저하고는 너무 거리가 멀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열심히 시작했는데 마침 형님이 무직으로 있다가 전차 운전사로 취직했지요 지금도 기억하지만, 그 당시 6천 원을 받으셨는데 레슨비로 3천 원을 4개월 지원해주셔서 서울대 이 모 교수를 찾아가서 제가 성악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 받아달라 고 사정을 해서 나를 받아주셨어요. 그후 열심히 해서 서울음대를 들어가게 됐죠. 그렇게 본격적으로 성악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겁니다.

서병선 씨가 성악의 정수를 안 것은 줄리아드에서 공부할 때라고 한다. 바로 그때부터 가곡 전도사로 나서게 된다.

서병선
: 서울대학에 어렵게 들어가 보니까 너나 나나 다 오페라 드라고요. 그 당시 성악에 대해 깊이 아는 것도 없지마는 대개 다 이태리의 가곡, 칸쪼네를 즐겨부르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성악의 깊이가 없더라고요. 귀는 즐겁게 하지마는 마음에 자양분을 줄수없는 노래들이지요. 오페라도 해 보니까 우리 힘엔 너무 벅찬 거예요. 수십 명의 합창을 뚫고, 또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 반주를 뚫고 나와야 되는데 한국사람의 작은 체구로서는 감당할수없어 소리에 큰 상처를 받게되지요. 1970년 뉴욕 줄리아드에 입학하여 반 장학금을 받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때 모든 성악의 정수는 아름다운 시와 아름다운 선율이 조화를 이루는 슈베르트나 브람스 같은 가곡이다. 오페라에 모든 열광을 퍼붓는 한국 음악계가 크게 잘못됐다. 이런 깨달음이 오더라구요.

서병선 씨는 어떻게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유학길에 나서게 됐을까? 서 씨는 줄리아드 역사상 최고 고령자로 입학했단다.

서병선: 제가 서울음대에서 3년을 마칠 무렵에 저의 후배인 방옥경 씨라고 뉴저지에 사는데 뉴욕으로 음악 공부하러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다방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때 유학분야에 밝은 좋은 분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분이 저의 테이프(TAPE)를 시카고 AMERICAN CONSERVERTORY로 보내 입학 허가서를 받았지요. 거기서 입학 허가서를 받아서 1969년 1월 추운 겨울에 와서 다음 해에 줄리아드에 와서 오디션을 거쳐서 입학하게 됐습니다. 그 당시 심사위원들이 그러더라고요. 줄리아드 역사상 네가 최고 고령자다. 32살에 제가 입학했습니다. 그래서 나이 많고, 돈도 없어서 식당에서 웨이터를 해 가면서 어렵사리 열심히 음악공부를 했지요.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전 세계를 상대로 가곡 보급에 큰 꿈과 용기로 전진하는 테너 서병선의 꿈과 야망의 세계 1부를 함께했다. 제2부에서는 줄리아드에서 공부하면서 어려웠던 일들, 세계에 가곡을 보급하는 일과 북한의 가곡 이야기 등으로 함께 한다. 세계의 한국인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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