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들의 고향 그리움

워싱턴-정영 jungy@rfa.org
2021-06-23
Share
실향민들의 고향 그리움
설날인 지난 2월 12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실향민이 북녘 고향을 향해 절하고 있다.

<앵커>  6.25 전쟁 71주년 RFA 기획특집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한반도에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있은 지 71 년이 됩니다. 같은 민족이 서로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휴전상태 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고 치유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요.

RFA에서는 전쟁이 가져다 준 상처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이 시간에는 6.25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고 현재 미국에 사는 “실향민들의 고향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를 정영 기자가 전합니다.

<한국현대사 교육영상 녹취1>: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선제타격 계획에 따라 38도선 전 전선에 거쳐 남침을 개시하였다.

(내레이션)지금으로부터 71년 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한국전쟁.

<한국현대사 교육영상 녹취2> 북한군은 서쪽에는 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는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는 육전대와 유격대를 상륙시켰다.

남한군은 격퇴에 나섰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한 강토에서 같은 언어를 쓰며 찬란한 문화를 꽃펴오던 우리 민족은 동족 대결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남북이 시작한 전쟁은 차츰 유엔군과 중공군의 대결로 변했고, 자유진영 대 공산진영의 이전투구장으로 변했습니다.

전쟁기간 수 백만명이 죽거나 다쳤고, 1천만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오늘까지 서신교환이나 전화통화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청소한 남북한 산업시설은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한국 전쟁을 지휘했던 맥아더 장군은 “이 나라를 복구하는 데 최소 100년이 걸릴 것이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면 6.25의 상처는 얼마나 깊고, 그 참상은 어땠을까?

서울에서 전쟁을 겪은 89세의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에 사는 강 할아버지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강 할아버지: 내가 들은 소식은 남한 방송에서 계속해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서 의정부까지 왔다. 그리고 의정부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요. 북한군이 남쪽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알았어요. 서울 월가까지 우리가 후퇴했다는 방송을 계속해서 들었어요.

북한은 “6.25전쟁은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의 불의의 침공으로 시작된 북침전쟁”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공격당한 북한이 반공격으로 넘어가 전쟁 발발 3일만에 남한의 수도 서울을 빼앗은 것은 세계전쟁사에도 유례없는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구 소련이 해체된 후 수많은 기밀자료들이 공개되면서 6.25전쟁은 스탈린과 중국 모택동의 비호를 받아 북한 김일성이 도발한 남침전쟁으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서울을 수복한 북한군이 ‘인민재판’으로 남한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했다고 강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강 할아버지: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온 것을 제가 봤지요. 그리고 북한군이 들어와서 우리 동네 중심지에 모이라고 하고 강연하고, 사람들을 잡아서는 “이놈들이 나쁜 놈들”이라고 잡아가는 것을 봤어요. 일명 인민재판이지요.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고 그러는 것이요.

북한군은 모자라는 병력을 벌충하기 위해 점령지에서 젊은 청년들을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끌어갔다고 강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강 할아버지: 서울에 있는 집에서 내가 자고 있는데 공산당이 밤에 와서 나를 잡아갔어요. 낮에 사람들이 잡으러 다니지 않고 빨갱이들이 밤에 청년들을 잡으러 와요. 동네에서 300명의 청년들이 훈련지로 끌려가는데 을지로 6가로 쭉 가면서 남쪽으로 갈 때 미군 비행기가 나타나서 폭격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미군 비행기가 나타나니까 전부 피하라고 해서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지붕 밑에 숨어 있다가 공습경보가 해제된 다음에 나는 모이는 곳으로 가지 않고 집으로 가버렸어요. 그때부터 저는 매우 위험했지요. 내가 잡혀서 군대에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집으로 돌아왔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시골로 도망을 쳤어요.

북한 강원도가 고향인 올해 90세의 안 할머니는 6월 25일 아침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안 할머니: 아침에 나는 할아버지와 아침상을 받아가지고 앉아서 밥을 먹는데 그냥 난데없이 왱왱 따발총을 여기 저기서 따다당 거리고 난리 법석이 나는 거야 공중에서 따발총을 쏘는 게 이북 사람들이 쐈는지 누가 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정신 없이 앉아 있었어. 홍천, 북천에서 그러니까 이북에서 곧바로 들어오는 다리가 있었어. 그 다리를 끊으려고 여기서 아군들이 거기다 대고 총과 포탄을 쏘는 데 그 다리를 끊지 못했어 그 다리를 끊어야 이북 사람들이 넘어오지 못하겠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동네 다리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피난을 가기 위해 갈팡질팡했던 당시 마을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서도 안 할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안 할머니: 새벽에 난리가 났지. 그런데 우리는 무슨 영문인지 알어? 우리 친정 동네에 기차 굴칸이 하나 있었어. 서울서 원주까지 가는 굴칸이 있었는데 그 굴칸으로 사람들이 다 쫓겨와서 모여 들었어. 그런데 그 굴칸에 폭탄을 한방 터뜨리면 다 죽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해? 그래서 우리는 산꼭대기 올라가서 여기다 쏘지 말라고 어떤 할아버지는 하얀 적삼을 벗어서 막대기에 걸고 흔들었어. 말도 못해… 그리고 나는 집에 들어왔는데 총을 또 쏘는데 어떻게 해? 그래서 우리 올케와 함께 솜은 총알을 뚫지 못한다고 해서 솜을 갖다가 등허리에 뒤집어 쓰고 있었어 말도 못해 말 더 못해. 아휴.

전쟁을 전혀 겪고 보지 못했던 시골 사람들은 어디 가서 숨어야 할지 초보적인 피난 방법도 몰랐다고 안 할머니는 증언합니다.

안 할머니: 우리 작은 아버지뻘 되는 사람은 바가지로 물 퍼먹는 곳에 있었는데 그 꼭대기에서 따발총을 쏘니까 물로 풍덩 뛰어 들어가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유, 작은 아버지 거기 들어가면 빠져 죽어요”라고 했는데 그래도 죽지 않고 도로 꺼내 왔어. 그때 놀랐는지 빨리 돌아갔어.

1950년 9월 중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아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역전됐습니다.

낙동강까지 진격했던 북한군이 급하게 퇴각하면서 농사꾼들의 옷을 빼앗아 입고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했다고 안 할머니는 말합니다.

안 할머니: 인민군대들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어. 아군이 들어오니까 이북 쪽으로 도망가는데 농사꾼들의 옷을 빼앗아 입고 농사꾼들은 그 북한군 옷을 입고 있다가는 빨갱이라고 맞아죽게? 인민군은 그 옷을 벗겨 입고 산으로 기어 올라가 어디론가 도망을 가고 아휴….

6.25전쟁은 1천만 이산가족, 즉 흩어진 가족을 발생시켰습니다. 눈을 잠깐 파는 사이 가족이 뿔뿔이 헤어지고 며칠만 기다리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난 아들은 70년 세월 이별의 한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강원도 안변이 고향인 올해 90세의 김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때 이별의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김 할아버지: 강원도 원산, 안변이라는 곳이 있어. 거기서 “어머니, 3일만 기다려 주세요”하고 떠났는데 나는 대한민국까지 올 줄 몰랐어. 그리고 애국 청년들을 데리고 큰길에 나오니까 피난 간다고 사람들이 인산인해야. 다 이북에서 나온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북한을 버리는 사람들 고향을 버리는 사람들이 오라고 해서 오는 사람들도 아닌데 피난민이 약 1만6천명이 넘었어.

세월이 흘러 지금은 고향에 어머니가 없을 줄 뻔히 알면서도 김 할아버지는 그때 어머니와 한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말합니다.

김 할아버지: 보고 싶은 것은 한없이 보고 싶은데 나도 이젠 늙어서 보고 싶어도 못 봐 다 죽었을 것이라고 내 생각에는 죽기 전에 내 동생은 살아 있을 테니까 내 죽기 전에 여동생 봐도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 산소가 있는 곳에 가보고 싶고 여동생은 살아 있을 테니까 보고 싶고 약혼자는 1950년 1월 30일 약혼식을 했어. 그때 학교 선생이 30명이었어. 약혼자를 보고 싶고. 그 나머지는 내가 포기하는 거야. 왜냐면 내 나이 90이 다 됐는데 어머니가 살아 있을 택이 없어. 어머니는 이젠 100살도 넘었을 것이고…

과연 김 할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고향에 갈 수 있을까? 이산의 1세들은 지금 이 시각도 전쟁의 아픈 상처를 하루 빨리 가시고 죽기 전에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가요/ 고향의 봄>

<앵커> 6.25 전쟁 71주년 RFA 기획특집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6.25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고 현재 미국에 사는 실향민들의 고향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 정영 기자가 전해드렸습니다.

하고 싶은 말 (0)

전체 질문 보기.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

원본 사이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