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갑④ 장마당의 추억 – ‘뻥튀기와 바꾼 신발’

워싱턴-김진국 kimj@rfa.org
2021-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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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갑④ 장마당의 추억 – ‘뻥튀기와 바꾼 신발’
/RFA Photo

(진행자) ‘통일의 주축, 장마당세대’ 60화 진행에 김진국입니다. 북한을 경험하고 북한을 전공하고 있는 북한 출신 여성 장마당세대의 유쾌하고 진지한 통일수다로 전해드립니다.

(진행자) 양강도와 회령, 무산, 연사군 출신인 한국 정착 여성 석사, 박사 학위 과정 학생들이 남한의 생활과 전공인 북한을 이야기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박세영) 저는 신라대학교 사회복지학 석사를 했고 국제지역학과에서 박사 수료를 했습니다. (변선숙) 고향은 함경북도 무산이구요. 충남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북한학과 석사 과정의 졸업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김민세)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고, 카톨릭대학교에서 상담심리학 석사 과정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정영희)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 중입니다.

(진행자) 북한의 장마당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요, 간단하게 거수로 조사를 해 보겠습니다. 내가 해당된다 라고 생각하시면 손을 드시면 됩니다. “나는 장마당에서 장사를 해 본적이 있다” 박세영, 정영희, 변선숙 씨가 손을 드셨군요. 가장 먼저 손을 들었던 박세영 씨부터 북한 장마당에서 어떤 장사를 하셨는지, 어떤 것이 기억에 나는지 말씀해 주시죠.

(박세영) 북한 장마당에서 10년 동안 일했기 때문에 할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이것 저것 다 해봤 지만 제일 많이 했던 것이 ‘신발장사’였습니다. 북한 시장(장마당)은 매일 장사하게 두지 않습니다. 장사를 하게 하다가도 갑자기 단속해서 장사 못하게 하고 그랬거든요. 자본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신발 장사를 할때도, 갑자기 경찰이 와서 마구 압수하거나 어떤 때는 한 두 컬레만 가져가곤 했습니다. 하루는 신발을 압수 당해서 안전원실에 가서 “내 물건을 찾으러 왔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하니 남자들이 “뻥튀기를 사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자 뻥튀기가 뭐지’라고 생각했는데,

(진행자) 제가 한번 맞춰보겠습니다. ‘담배’ 아닐까요?

(박세영) 네 맞습니다. (신발을 압수했던) 안전원들이 담배를 사오라고 하는거예요. 내가 이걸 사야되나 말아야 하나 생각했거든요. 뺏긴 신발 가격보다 담뱃값이 적고 안전원들은 앞으로도 봐야하잖아요. 그래서 담배를 사줬죠. 중국담배를 북한돈 30만원 어치 사줬어요. 또 한번은 또 한번은 애들도 엄마 따라 장마당에 나오거든요. 아이들이 노래를 가사를 바꿔서 부르더라고요. “안전원이 온다. 순찰대가 온다. 장마당이 들끓는다. 뛰어가는 사람, 달아나는 사람” 이렇더라고요. 일곱 살 짜리가 부르니 얼마나 귀워였겠어요. 또 한번은 갑자기 (안전원들이) 장마당 입구와 출구를 막고 단속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팔려돈 신발들을 급히 싸서 화장실에 숨었어요. 뒷문으로 달아나려고 하는데 안전원에 붙잡힌 거예요. 하지만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어서 뒷문을 슬쩍 열어서 내보내주더라고요. 그 안전원이 당시 나이가 많으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겠지만 통일이 돼서 만나게 되면 그때 너무 고마웠다고 인사드리고 싶어요.

(박세영) 그렇게 시장에서 거의 10년을 그렇게 고생하다 보니까 한국에 와서는 장사라고 하는 것은 뒤도 돌아보고 싶지 않을 정도가 됐습니다.

(진행자) 장마당 생활 10년이면 거의 북한에서의 장마당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인 2000년 정도에 장사를 시작했고 북한을 떠나기 직전까지 장사를 하다 오셨다는 거네요. 변선숙 씨가 말씀해 주실까요?

(변선숙) 박세영 씨보다는 장사 경험이 많지 않아요. 저는 1998년에 탈북했거든요. 북한이 제일 어려웠던 시기였어요. 1994년 정도부터 북한이 급격하게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골목시장이 형성됐고 장마당이 아니면 먹고 살 수가 없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쫓겨도 거기(장마당)를 나갈 수 밖게 없었습니다. 그때 결혼해서 1년 만에 아이가 생겼고 어쩔 수 없이 장마당에 나가게 됐습니다. 장마당이라고 생각하면 가장 가슴아픈 부분이 아이를 업고 하루 종일 서서 일했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자리를 뺏길까 하루 종일 다른 곳에 가지도 못하고 한 곳에 서 있어야 했어요, 그렇게 일하다가 집에 가서 아이를 내려놓고 보면 아이 엉덩이가 빨갛게 익은 것을 보면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장마당에서 하루 종일 아이를 업고 장사하는 것은 힘들다고 해서 나중에는 청진에서 물건을 떼다가 무산에서 팔고, 무산에서 물건을 떼다가 청진에서 파는 장사를 했어요. 기차를 이용해야 했는데, 그때도 아이를 업고 다녔죠. 청진에서는 미역을 가져다가 무산에 가서 팔았고요. 무산에서는 특별히 청진으로 가져갔던 것은 없었어요. 청진에서 미역이나 설탕을 가져가서 무산에 가서 팔았는데, 당시 북한에는 기차를 타려면 증명서가 있어야 했는데, 증명서 없이 애기를 업고 다녔어요. 안전원들이 증명서가 없어도 애기 엄마들은 봐줬어요. 그사람들도 아마도 애기 엄마들이 힘들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아요. 안전원들이 점심이라도 사먹으려고 하면 애기를 업은 엄마들에게 가서 사먹어주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참 아픈 기억이네요.

(정영희) 저는 다른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래도 나는 상대적으로 고생을 덜했구나’ 생각했습 니다. 장마당에서 10년 일하신 분도 계신데 저는 7년 정도 일했습니다. 부모님이 옷을 만드는 재봉사셨어요. 엄마가 옷을 만들면 저는 장마당에 가져가서 팔았습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카세트 있잖아요, ‘벽돌’이라고 불렀어요. 그렇게 음악을 듣거나 한국의 드라마나 중국의 영화를 가까운 지인을 통해서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이 연결해가면서 중국으로 가는 통로를 알선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통로를 많이 알려면, 군인들을 많이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중국변방을 지키는 국경경비대 군인들을 통해서 중국 쪽에서 물건을 받아오거나 반대로 북한 쪽에 필요한 물건을 요구하면 사서 넘기는 일도 했습니다. 그렇게 다른 지역에서 오는 친인척분을 중국으로 가도록 알선하는 일도 했습니다. 장마당이라고 하면 생계를 업으로 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생계 외에 정보를 교환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저도 장마당에서 옷장사를 하는 척하면서 중국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중국행을 주선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진행자) ‘북한 전공 탈북 여성들의 유쾌한 통일 수다’ 다음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진행자) 세대와 지역의 인식 차이를 넘어서 한반도 미래의 길을 찾는 나침반이 되려는 ‘통일의 주축 장마당세대’ 제60화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김진국입니다. 청취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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