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착 쎈언니들의 통일수다 -US환불원정대①

워싱턴-김진국 kimj@rfa.org
2020.11.02
us_strong_sisters_b US환불원정대 편에 참여한 미국 정착 쎈언니들 (왼쪽부터 박은주, 박유정, 황지영, 편지은, 에블린 정).
/RFA Photo

(진행자) ‘통일의 주축, 장마당세대’ 40화 진행에 김진국입니다. 고향인 청진을 떠나 미국을 새로운 고향으로 선택한 에블린 정 씨에게 최근 미국 주요 도시에서 똑소리 나게 살고 있는 든든한 언니들이 네 명이나 생겼습니다. 미국 공무원, 변호사, 교사, 연구원인 이들이 미국 생활 6년 째인 에블린 씨와 온라인 공간에서 만났습니다. 북한과 한국 출신 장마당세대 여성들의 유쾌하면서 진지했던 통일수다를 소개합니다.

(박유정) 저는 미국의 동남부 아틀랜타에 살고 있는 박유정이고요, 미국에 이민 온 지는 20여년됐고 현재 16개 도시를 포함하는 카운티(County)에서 행정최고책임자(Commissioner)의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박은주)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주도인 새크라멘토에 살고 있고요, 이름은 박은주라고 하고 미국 온 지는 35년 정도됐지만 계속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거주 기간은 20년 정도 됩니다. 예전에 하던 일은 교사였는데요, (해외 근무 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 온 지 1년 밖에 안되어서 현재는 집에서 가족을 돌보며 지내고 있습니다.

(편지은) 저는 편지은이고요, 미국 텍사스 주 달라스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 온 지는 16년 되었습니다. 지금은 조지 부시 대통령 센터에서 미얀마라고도 불리는 버마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를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황지영) 안녕하세요, 저는 황지영이고요, 어렸을 때 남미의 아르헨티나로 이민 가서 30년 정도 살다가 미국 온 지는 3년 됐고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에블린 정) 저는 지금 시카고에서 살고 있고 그전에 조지아에서 잠시 살았고 처음 미국에 정착한 도시인 덴버에서 3년 등 6년 정도 미국에 살았습니다. 미용 관련 직장에서 일하고 있고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네 분의 미국(남미 포함) 생활을 다 합하면 100년이 넘네요. 어릴 때 미국에 와서 각자 분야에서 또렷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여러분들의 경험과 지혜를 매일 새로운 미국을 배우고 있는 에블린 양에게 전수해 주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북한과 한국에서 받은 6·25교육의 차이

(진행자) 오늘 대화의 첫 번째 주제는 ‘거리 줄이기’입니다. 북한과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차이가 있고요. 70년대부터 2000년대에 초등교육을 받았다는 차이도 있습니다. 각자의 경험을 나누면서 서로의 거리감을 좁혀가고 싶은데요. 남과 북을 70년 넘게 나눈 한국전쟁을 어떻게 배웠나를 이야기해보죠.

(박유정) 6월에 호국보훈의 달, 이어서 글짓기 대화, 나의 주장 발표대회, 포스터 그리기 대회에 참여했던 기억이 나구요, 저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90년 대에 다녔기 때문에 그대 한반도 정세나 정책에 의해서 ‘민족공동체·의식·함양을 위한’이라는 긴 구호를 많이 접했고 사용했던 기억이 나요. 우리는 하나, 평화통일, 민족공동체 이런 단어를 많이 사용했었고, 그때 받은 교육이 성인이 된 지금의 제가 가진 남북문제를 보는 시각의 기초가 됐습니다. 하지만 반공세대의 관점과 태도도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미국 온 직후 6·15 정상회담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최신 뉴스로 다뤄지는 (남북) 정상회담 뉴스를 보면서 ‘아 통일이 가까워 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참여하신 분 중 제가 가장 어린 나이에 미국에 왔기 때문에 부모님과의 대화를 제외하고는 북한과 관련한 교육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박은주) 저는 유정 씨 보다는 조금 더 반공 교육이 더 철저한 시절을 살았어요. 머리 뿔달린 도깨비로 북한 사람들을 묘사하던 시대에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전쟁이 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큰 시절이었고 북한이나 공산당이라는 단어가 공포심을 유발할 정도로 주변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때(6월)가 되면 웅변대회, 포스트 그리기 대회, 표어짓기, 이런 것들을 많이 했고 삐라 줍기도 많이 했어요 (박유정/ 우와 삐라줍기요?) (박은주) 네 삐라도 주워오면 학교에서 상 같은 것으로 연필, 공책 등 학용품을 받기도 했습니다.

(편지은) 저는 토마토 농사 많이 하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컸어요. 학교 수업 외에는 북한에 대해서 알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들이 적었던 것 같아요. 80년대와 90년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다닌 세대입니다. 저도 유정 씨와 비슷하게 포스터 그리기 했고 반공포스터 그렸던 기억이 나고요, 하나 더 기억나는것은, 고무줄 놀이 할 때 친구들이랑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이런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나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부르고 고무줄을 넘었어요. 이런 노래를 외우고 놀이 때에 불렀던 것을 보면 반공의 분위기가 머리 속에 각인되었던 것 같아요. 통일은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라고 배운 세대가 우리 세대(지금 30대 또는 40대 초반)가 아닌가 싶습니다. 재밌는 것은 제가 7살 어린 여자 동생이 있는데요, 그 친구는 90년대 2000년대 학교를 다닌 친구죠. 그 친구에게 물어보면 굉장히 통일이나 북한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져요, 그러나 금강산을 수학여행으로 다녀온 세대예요, 재밌는 것은 제 동생 반에서 “통일은 꼭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봐라”는 설문을 하니 반에서 두 명 정도만 손을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나머지 친구들은 통일 비용에 대해서 걱정하고 통일은 무조건 적으로 해야 한다는 우리 세대와는 그야말로 ‘세대차이’가 나는 세대더라고요.

(SIGNAL MUSIC)

(진행자)세대와 지역의 인식 차이를 넘어서 한반도 미래의 길을 찾는 나침반이 되려는 ‘통일의 주축 장마당세대’ 제40화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김진국입니다. 청취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