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10년 2월 13일 '바로 보는 북한 언론' 시간입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음력설을 맞게 됩니다. 민족 최대의 명절에 대한 의미도 남과 북이 서로 달라 북조선 인민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개인 우상숭배가 없는 남조선에서는 지금도 음력설과 추석 등 민속명절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쇠고 있습니다.
북녘 동포들도 올해 음력설에는 어떻게 하나 명절 음식다운 음식상을 차려놓고 설을 쇠야 할 텐데 라는 기대를 가져보면서 오늘 시간 시작합니다.
지난 1월 22일자 노동신문을 보니까, 고 김일성 주석이 걸었던 '광복의 천리길' 85주년을 맞아 "수령님(김일성)께서 그 '광복의 천리길'을 걷던 의지로 이 땅에 인민이 주인 된 참된 사회주의 낙원을 세웠다"고 선전하고 주민들에게 "수령복, 장군복을 누리는 긍지를 안고 만경대 혁명일가의 뒤를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해 최근 떠오르고 있는 김정은의 권력세습을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광복의 천리길'에 대한 노동신문 기사를 놓고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광복의 천리길'은 1925년 1월 22일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이 일제경찰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4살의 김일성이 나라를 독립하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평양 만경대에서 중국 팔도구까지 걸었다는 천리길입니다.
저도 고등중학교 때 '광복의 천리길'을 답사해본 경험이 있어 그 노정이 얼마나 험한지 잘 압니다. 북한에 '광복의 천리길' 외에 '배움의 천리길'이라는 답사 노정이 하나 더 있기는 한데, 이는 양강도 팔도구에서 평양 만경대까지 나가는 노정입니다.
둘 다 천리길이니 당연히 어렵지만, 겨울에 걷는 '광복의 천리길'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특히 가장 험한 구간인 오가산 령을 넘을 때는 발을 옮기기 힘들어 질질 끌고 따라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가 80년대 중반이었으니까, 그래도 자동차 길이 있어 괜찮았지만, 14살의 김일성이 걸을 때는 대낮에도 맹수들이 출몰했다고 하니 오죽 무서웠겠냐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광복의 천리길'이 험한 노정이라는 설명은 여기서 줄이고, 북한이 왜 '광복의 천리길'답사를 아직까지 장려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1월 22일은 김일성이 '광복의 천리길'을 걸은 지 꼭 85년이 되는 동시에, 김정일이 답사노정을 열어주었다는 35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날을 맞아 지난 1월 22일 평양을 출발한 '광복의 천리길' 답사대가 4일 포평에 도착했다는 노동신문의 보도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천리길 답사를 북한에서는 12~14살 학생들에게 걷도록 합니다. 김일성처럼 어린 아이들에게 혁명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김정일의 조치로 취해진 것입니다. 북한은 지도자와 관련된 행사나 기념일을 기리는 차원에서 이러한 행사를 자주 진행합니다.
이렇게 북한 당국이 조직적으로 걷게 하는 '광복의 천리길' 외에 요즘에는 남몰래 천리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함경북도 회령과 무산군에서는 어떤 동네가 통째로 달아났다는 말이 돌만큼 마을은 텅텅 비었고, 평양과 남포에서도 천리길을 걸어 국경으로 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10대의 어린이에서 늙은이까지, 어떤 애들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 탈북에 나섭니다. 도보로, 자동차를 얻어 타고 국경으로 나오는 노정은 신통히 김일성이 걸었던 '광복의 천리길' 노정과 같습니다.
다르다면 85년 전 김일성이 마음대로 국경을 넘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군대가 막고 있습니다. 북한 인민들이 국경을 넘자면 미화 2천 달러를 군대와 안내자에게 줘야 안전하게 넘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85년 전 김일성은 압록강을 마음대로 넘었습니다. 일본 경찰은 살기 어려워 떠나는 사람들을 그냥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북한 인민들은 배가 고파도 마음대로 국경을 넘을 자유마저 없습니다. 뛰다가 잡힌 사람들을 북한당국은 '민족 반역자'로 몰아 정치범 수용소에 끌어갑니다.
지금까지 한국에 나온 탈북자가 약 2만여 명 가량 됩니다. 이들이 북한을 탈출하는 과정에 여러 가지 사연을 갖고 있지만, 그중에는 국경경비대의 추격을 받아 두만강 물에 뛰어들었다가 영영 솟아나지 못한 어느 한 10대 탈북 소녀의 비극은 아직도 듣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십니다.
이 소녀의 어머니도 굶주림으로 남편을 잃고 딸마저 죽일까봐 그를 안고 사품 치는 두만강 물에 뛰어들었지만, 결국은 검푸른 두만강 물은 어린 소녀를 삼켜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은 배고픈 고통입니다. 노동신문도 기사에서 김일성, 김정일이 "우리 인민은 참 좋은 인민"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썼습니다. 굶주리면서도 반항할 줄 모르는 그런 인민, 굶어 죽으면서도 장군님의 건강을 염려하는 그런 좋은 인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그런 좋은 인민들은 다 굶어 죽고, 남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 땅을 떠나고 있습니다.
(북한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의 아리랑 음악)
이 음악은 북한에서 90년대 초부터 김정일의 지시로 제작되기 시작한 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의 시작 부분에 나옵니다. 음악과 함께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안고 해외로 떠나는 남편이 아내와 눈물 속에 헤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눈물의 장면이 바로 지금 중국과 마주하고 있는 국경지역에서 재연되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반세기 전 일제의 등쌀에 못이겨 남의 나라 땅으로 쫓겨 갔지만, 지금은 그 후손들이 배고파 다른 나라로 떠납니다.
이 사람들 가운데는 압록강 변에 서서 내가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다시 돌아올 날이 과연 언제일까, 조국이 통일 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비장한 맹세를 다지며 돌아서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85년 전 김일성이 독립을 다짐하며 떠났던 ‘광복의 천리길’, 이제 그 천리길은 “통일이 되기 전에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며 떠나는 후손들의 ‘눈물의 천리길’로 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