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호텔을 경영하고 있는 최철씨는 6.25 직전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왔으며 현재까지 가족의 생사를 모르고 있습니다. 최씨는 2남의 장남이며 현재 북한에 살아 있을지 모르는 남동생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향은 어디신가요?
황해도 은율입니다.
언제 고향은 떠나셨나요?
6.25 직전에 왔습니다. 남쪽에 한번 오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당시 나이가 어떻게 되셨나요?
당시 18, 혼자 왔습니다.
북한에 현재 살아 계실 가능성이 있는 가족 분들은 누가 계신가요?
제 동생과 조카들이 있겠죠. 부모님들은 다 연세가 있으시니까
그럼 고향을 떠나오신지 벌써 60여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동안 소식 들으신 게 없으신가요?
6.25 때 내 동생도 인민군 나갔다가 죽지 않고 돌아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 후 혼자 남한에서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월남해서 고생 안 해 본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월남할 때 3.8선 넘은 것, 6.25때 죽을 뻔한 것, 다 잊어버리니까 사는 것이지 그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살 수 있겠습니까?
그 동안 고향 많이 그리워 하셨죠?
죽을 때까지 어머니라는 말이 제일 그립고 다정하듯이 고향이라는 것이 가장 그리운 곳이 아닙니까?
고향은 어떤 곳 이었나요?
도청 소재지고 과수원도 많고 살기 좋은 곳이었죠. 아주 좋은 곳인데.. 김구 선생님 이승만 박사님 다 거기 출신입니다.
2년 전에 평양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셨다고 들었는데 어떤 기회로 방북하셨나요?
평통으로 갔죠. 평통에서 처음으로 북한 방문을 했죠. 그때는 이산가족 상봉으로 간 것이 아니고 평통이 갔다 온다는 의미로 갔습니다.
당시 가족의 소식을 들으셨나요?
그때 우리 가족의 사항을 다 써서 당국자에게 다 보여줬습니다. 찾아 달라고. 그랬더니 이것 너무 오래되어서 한 10명 정도 동원 되어야 찾을 수 있다며 다음에 한 번 더 와달라고 했습니다.
방북 당시 내심으로는 가족 소식을 듣고 싶어 하셨을 텐데요.
간절했죠. 많이 기대했었는데 결국은 가족 상봉으로 간 것이 아니니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 가족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동생 분한테 어떤 것을 선물로 먼저 해주고 싶은가요?
사실 여기서 우리 가족들 돕는 것이 여기서 생각하는 것과 화폐 단위가 다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 5천불 만불 주고 왔다고 하는데 여기 돈 1천불이 거기서는 엄청난 돈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서 선물을 만나면 뭘 갖다 주겠다 그것 보다는 여기 사람들은 거의 여유가 있으니까 여기서 고정적으로 생활비를 보낼 수가 있겠죠.
이산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남북한 당국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일 먼저 우선 통신 서신 교환부터 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어요? 숫자가 많으니까 한꺼번에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겠어요? 우선 주소부터 확인해서 생사 확인해서 가족들끼리 서신교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평소에 하고 싶으셨던 얘기가 있으시면 이번 기회에 전달해 주세요.
하루속히 한번 만나보고 싶고 하루속히 남북관계가 좋아져서 자유롭게 만나고 편지하고 이쪽에서 여유가 있으면 서로 돕고 그런 심정입니다.
최철씨의 가족에 대해 소식을 아시는 분이나 그 밖에 자신의 이산가족의 사연을 전달하고 싶으신 분은 RFA '이산가족 이야기' 담당자 앞으로 사연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우편으로 보내실 분은 일본 동경 중앙 우편국 사서함 507호로, 이메일, 즉 전자우편으로 보내실 분은 nk@rfa.org, 팩스를 이용하실 분은 미국 팩스 번호 202-530-7765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사연 부탁드립니다.
워싱턴-이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