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이야기: 국가대표 역도 선수 출신 김해남씨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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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수경 lees@rfa.org

이산가족 이야기, 오늘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남한 국가 대표 역도 선수 출신 김해남씨의 사연을 전해드리겠습니다. 평북 영변이 고향인 김씨는 해방 직후 공산당 정권에 대항한 신의주 학생 운동에 연루되어 감옥생활을 한 뒤 남쪽으로 도피해 온 것이 영영 가족들과 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김해남: 나 누군지 아십니까? 대한민국 올림픽 계속 4번 나간 사람입니다. 제가 역도에 김해남입니다. 1952년도 헬싱키 올림픽 4위, 멜버른 올림픽 5위, 로마 올림픽 4위, 동경 올림픽 6등하고 은퇴했어요.

자신의 소개를 좀 해달라는 말에 김해남씨는 이름, 고향, 나이 이런 거 일절 생략하고 대뜸 올림픽에 4번 출전한 국가대표 역도 선수임을 밝혔습니다. 그만큼 김씨의 인생에서 역도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씨가 역도라는 운동을 처음 시작한 것은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에서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늘 일본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김씨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역도를 시작했습니다.

김해남: 어릴 적부터 일정 때 힘이 약하면 윗반 학생들에게 매 맞거든요. 부잣집 아들이라고 돈도 달라고 하고 그래서 힘이 약하면 그렇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향에서 역도를 시작했어요. 옛날에는 역도 기구가 없어서 돌을 쪼아서 가운데 구멍을 뚫어서 파이프를 연결해서 그것으로 운동을 했어요.

역도를 시작한 이후 학교에서 김씨를 함부로 건드리던 학생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김씨를 따르는 무리가 생겼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대장이 된 것입니다. 김씨의 대장 역할은 영변 농업고등학교 재학시절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장으로써 김해남씨는 김일성 공산정권에 대항한 1945년 11월 '신의주 학생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고 그 일로 김씨의 인생은 하루아침에 완전히 달라집니다.

김해남: 옛날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납니다. 해방 직후에 신의주 학생 사건이 있었어요. 신의주 학생 사건은 반공학생 총 궐기 대회입니다.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서 일으킨 것입니다. 그때 내가 연루되어서 유치장에 들어가 있다가 나와서 학교도 퇴학당하고 집에서 떠나라고 해서 그때 단신 떠난 것이 경성으로 넘어가서 좌우간 갖은 고생 다하면서 미국 땅까지 와서 지금 내 나이 80이 되는데 고향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납니다.

신의주 학생 사건을 계기로 김씨의 집안도 풍지 박산이 났습니다. 원래 지주집안이었던 데다가 장남이었던 김해남씨까지 반동으로 낙인찍힘으로써 가족들은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함경도 오지로 강제 이주당한 것입니다.

한편, 가족들과 헤어져 서울에 혼자 내려 온 김씨의 고생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온갖 일은 다 해 봤다는 김해남씨. 그나마 어릴 적부터 역도로 다져진 몸이었기에 남들보다 더 일을 많이, 잘 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김해남: 집에서 떠나서 서울까지 오는데 한 달 열흘이 걸렸어요. 버스 조수 노릇도 하고 얼굴에 광대까지 그리고 왔어요. (경성에는 아시는 분이 계셨나요?) 없었어요. 고향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경성은 모르는 곳이니까 동서남북이 어딘지도 모르겠는 거예요. 서울 사람들 야박하던데요, 이북 말을 쓰니까 서울 사람들이 곁을 안줘요. 이럭저럭 해서 을지로 4가 고향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걸어서 찾아 갔는데, 고향 사람들 만났는데 그 사람들도 배고픈 시절이니까 밥 먹으란 말도 안하더라구요.

여기 경성에는 먹고 살려면 장작 패는 것 있다. 그 때 경성에서는 부잣집에서 장작패는 사람을 불러서 패요. 그거 패면 밥도 주고 돈도 주고 그래서 하루 종일 그런 일도 하고 못해본 일 없습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나날이었지만 김씨는 역도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꿈은 이뤄진다고 했던가요? 김 씨 에게 그런 날이 찾아 온 것입니다.

김해남: 그 당시에 서울 운동장에서 전국체육대회를 하는데 제가 역도 경기에 나갔어요. 가슴에다 붙일 것이 없어서 '평북'을 달고 나갔어요. 마침 1등을 했는데 서울 배재 중학 체육 주임이 그 대회 끝난 다음에 저한테 와서 학교 다닐 생각이 없냐고 해서 다닐 생각은 있지만 돈이 없어서 학교 못가요 했더니, 대번 하는 얘기가 학교 등록금 없이 공부 시켜 줄게 했어요.

당시 남한 최고의 학교였던 배재 학교에 입학한 김 씨는 그곳에서 본격적인 역도 수업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졸업하는 날까지 각종 대회에서 획득한 우승컵 7개를 학교에 안겨 주었습니다. 이후 그는 남한에서 국가 대표 선수로 활약하다 은퇴한 뒤에는 국제 심판 자격으로 미국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실향민들이 모두 그렇듯이 김해남씨 역시 죽기 전에 고향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김씨는 말합니다. 추석이 오면 영변 고향땅에 묻혀드리지도 못한 부모님과 형제들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고. 이번 추석은 또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렸습니다.

김해남: 특히나 추석 때가 가까워 오면 괴로워요. 그것은 실향민들은 다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어떤 실향민은 추석 때만 오면 달력을 외면하는 사람이 있는데 저도 그 사람 중 한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