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전망대] DMZ 벙커
박봉현∙ 자유아시아방송 한국어 서비스 국장
2009.11.19
2009.11.19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 밖에서 일어나지만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박봉현의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DMZ 벙커’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공포정치를 편 독재자들이 대체로 그랬듯이 구소련의 독재자 스탈린도 남달리 의심이 많았습니다. 자신이 정적을 무참히 제거한 것처럼 언제 반격을 당할지 몰라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일례가 벙커건설이었습니다.
1939년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스탈린의 벙커는 모스크바 지하 깊숙이 자리 잡았습니다. 궁전처럼 화려하게 꾸며진 벙커는 스탈린의 집무실이 있는 크렘린 궁과 터널로 연결됐습니다. 길이가 무려 10마일이나 됩니다. 직장인들이 매일 출퇴근하듯 스탈린은 경호원들을 데리고 크렘린궁과 벙커를 오갔습니다. 번거로워도 정적의 반격에 비명횡사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재임한 31년 가운데 약 24년을 벙커에서 아무 걱정 없이 철권통치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후임인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지금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 벙커는 스탈린이 최악의 지도자임을 재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독재자 서열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히틀러도 벙커와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히틀러는 베를린에 있는 옛 황제의 공관 북동쪽 지하 8.2m 지점에 벙커를 만들었습니다. 30개의 방이 갖춰진 벙커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936년 1차로 완공된 포어벙커와 1945년 2차로 마무리된 히틀러 벙커는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히틀러는 2차대전 때 호화 가구로 장식된 이 벙커에 숨어지내다 연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고 바로 이 벙커에서 자살했습니다. 히틀러 벙커는 하도 땅속 깊숙한 곳에 4m 두께로 돼 있어 1947년 소련군과 1959년 동독정부가 파괴하려다 실패했고, 그 후 독일 통일로 주택건설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대부분 파손됐습니다.
벙커 자리에는 조감도와 간략한 정보가 적힌 작은 표지판이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지만 히틀러의 만행은 세계인의 기억에서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을 겁니다.
북한이 2007년 당시 한반도 비무장지대에 최소 800개의 벙커를 건설했다고 북한정보에 밝은 탈북자가 밝혔습니다. 한국군 정보사령부의 요청으로 대북정보 수집활동을 해 온 이 탈북자는 이 벙커들이 남침용이라는 섬뜩한 주장을 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휴전선 일대에서 대형 땅굴이 잇달아 발견돼 온 나라가 한바탕 난리를 치른 적이 있습니다. 한국민들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이 북한의 의도에 치를 떨었었습니다. 그런데 탈북자의 벙커 건설 주장은 당시의 소스라쳤던 기억을 되살립니다.
이 탈북자는 북한이 무력통일 야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자회담 당사국들이 긴밀하게 접촉하고 미국도 북한과 양자 대화를 성사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상황에서 터져나와 요즘 유화적 행동을 하는 북한의 다른 뜻을 생각하게 합니다.
유사시 북한군인들이 남한군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남한 군복과 명찰을 벙커에 다량 확보해 놓고 있다는 증언에서는 북한의 치밀함이 드러납니다.
게다가 벙커 안에 1천500 명에서 많게는 2천 명이 완전무장할 수 있는 작전물자가 갖춰져 있다는 탈북자의 말은 북한의 적화통일 기도를 구체화하고 있다는 의혹을 살 만합니다.
한국정부는 이 같은 증언에 대해 확인을 거부했고, 국민이 느끼는 안보불안은 가시지 않습니다. 탈북자의 벙커 증언은 한반도가 아직도 휴전상태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북한의 벙커가 훗날 스탈린의 벙커처럼 관광지로 변하든 히틀러 벙커처럼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방치되든 괘념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때까지 구소련이나 독일에서처럼 독재자의 만행으로 무고한 희생자가 생길까 염려됩니다.
공포정치를 편 독재자들이 대체로 그랬듯이 구소련의 독재자 스탈린도 남달리 의심이 많았습니다. 자신이 정적을 무참히 제거한 것처럼 언제 반격을 당할지 몰라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일례가 벙커건설이었습니다.
1939년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스탈린의 벙커는 모스크바 지하 깊숙이 자리 잡았습니다. 궁전처럼 화려하게 꾸며진 벙커는 스탈린의 집무실이 있는 크렘린 궁과 터널로 연결됐습니다. 길이가 무려 10마일이나 됩니다. 직장인들이 매일 출퇴근하듯 스탈린은 경호원들을 데리고 크렘린궁과 벙커를 오갔습니다. 번거로워도 정적의 반격에 비명횡사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재임한 31년 가운데 약 24년을 벙커에서 아무 걱정 없이 철권통치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후임인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지금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 벙커는 스탈린이 최악의 지도자임을 재확인해주고 있습니다.
독재자 서열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히틀러도 벙커와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히틀러는 베를린에 있는 옛 황제의 공관 북동쪽 지하 8.2m 지점에 벙커를 만들었습니다. 30개의 방이 갖춰진 벙커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936년 1차로 완공된 포어벙커와 1945년 2차로 마무리된 히틀러 벙커는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히틀러는 2차대전 때 호화 가구로 장식된 이 벙커에 숨어지내다 연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고 바로 이 벙커에서 자살했습니다. 히틀러 벙커는 하도 땅속 깊숙한 곳에 4m 두께로 돼 있어 1947년 소련군과 1959년 동독정부가 파괴하려다 실패했고, 그 후 독일 통일로 주택건설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대부분 파손됐습니다.
벙커 자리에는 조감도와 간략한 정보가 적힌 작은 표지판이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지만 히틀러의 만행은 세계인의 기억에서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을 겁니다.
북한이 2007년 당시 한반도 비무장지대에 최소 800개의 벙커를 건설했다고 북한정보에 밝은 탈북자가 밝혔습니다. 한국군 정보사령부의 요청으로 대북정보 수집활동을 해 온 이 탈북자는 이 벙커들이 남침용이라는 섬뜩한 주장을 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휴전선 일대에서 대형 땅굴이 잇달아 발견돼 온 나라가 한바탕 난리를 치른 적이 있습니다. 한국민들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이 북한의 의도에 치를 떨었었습니다. 그런데 탈북자의 벙커 건설 주장은 당시의 소스라쳤던 기억을 되살립니다.
이 탈북자는 북한이 무력통일 야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자회담 당사국들이 긴밀하게 접촉하고 미국도 북한과 양자 대화를 성사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상황에서 터져나와 요즘 유화적 행동을 하는 북한의 다른 뜻을 생각하게 합니다.
유사시 북한군인들이 남한군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남한 군복과 명찰을 벙커에 다량 확보해 놓고 있다는 증언에서는 북한의 치밀함이 드러납니다.
게다가 벙커 안에 1천500 명에서 많게는 2천 명이 완전무장할 수 있는 작전물자가 갖춰져 있다는 탈북자의 말은 북한의 적화통일 기도를 구체화하고 있다는 의혹을 살 만합니다.
한국정부는 이 같은 증언에 대해 확인을 거부했고, 국민이 느끼는 안보불안은 가시지 않습니다. 탈북자의 벙커 증언은 한반도가 아직도 휴전상태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북한의 벙커가 훗날 스탈린의 벙커처럼 관광지로 변하든 히틀러 벙커처럼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방치되든 괘념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때까지 구소련이나 독일에서처럼 독재자의 만행으로 무고한 희생자가 생길까 염려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