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X의 또 다른 피해자

워싱턴-박봉현 parkb@rfa.org
2017.02.28
vx_detection-620.jpg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지난 13일 맹독성 신경작용제 VX 공격을 받고 사망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2에서 말레이 당국이 26일 독극물 제거작업을 진행했다. 사진은 출국장 곳곳에서 독극물을 오염 예상지역을 찾는 당국자들.
사진-연합뉴스 제공

앵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분석해보는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VX의 또 다른 피해자’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3월 초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던 미국과 북한의 반관반민(트랙 1.5) 접촉이 무산됐습니다. 미국 땅에서 약 6년 만에 성사되는 회동인 만큼 살얼음 걷듯 조심스럽게 진행돼 온 대화 노력이 북한 관리들에 대한 미국 국무부의 막판 비자 발급 거부로 전격적으로 물거품이 됐습니다. 북한의 김정남 암살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격이라는 게 대체적인 진단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겉으론 대북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처럼 북한과의 회동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지는 않았습니다. 정부 차원은 아니더라도 전직 관리나 민간 전문가들의 이른바 ‘비선 접촉’의 문을 열어두었던 것이죠. 북한도 미사일을 쏘고 관영매체들을 동원해 한미 연합군사훈련에 대해 원색적이고 공격적인 발언을 쏟아냈지만, 내심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미국의 정책을 파악하려는 북한의 시도는 최선희 외무성 미국국장의 최근 스위스 제네바 발언에서 드러났습니다.

미북 물밑 접촉 추진이 보도되면서 한껏 기대를 모았던 회동성사는 사태 급 반전으로 몇 시간 만에 파탄 났습니다. 이번 회동이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 진작에 첫걸음이 될 거라는 희망도 적어도 당분간은 사라졌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판을 깬 것은 김정남을 암살한 것으로 판단되는 북한의 만행이라는 겁니다. 김정남 피살에 북한의 국가보위성 등 정부기관이 개입됐다는 한국 국가정보원의 발표가 있지만, 김정은이 직접 지시했는지, 내부 권력투쟁에서 비롯된 것인지,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김정남 암살로 미북 회동이 산산조각 난 현실입니다.

사실 북한의 탄도미사일 시험발사와 김정남 테러 사건 이후에도 미국은 북한과 접촉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의 위중함을 인지하면서도 대화의 실낱희망을 붙들고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입니다. 미국의 북한 전문가는 한 방송에 나와 김정남 살해에 치명적 독성의 신경자극 화학물질인 ‘VX’가 사용된 점을 ‘결정적 사유’로 들었습니다. 다른 주류 언론매체들도 유사한 의견을 내놨습니다. 유엔에서 대량살상무기로 분류된 물질이란 점이 트럼프 행정부에겐 큰 부담이 됐을 거란 주장입니다. 미북 접촉을 계속 추진하기 힘든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겁니다. 미국으로선 불확실한 실리를 좇느라 명분 없는 접촉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VX보단 트럼프 개인적인 판단이 결정타를 날렸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김정남 암살에 VX가 사용됐다는 말레이시아 당국의 발표 이후에도 미 국무부는 북한 관리에 대한 비자 발급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입니다. 국제사회는 1997년 화학무기금지협약에 의거해 VX 개발과 사용을 금지했지만, 한국국방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VX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트럼프의 개인적인 반감이 크게 작용했을 거란 시각도 있습니다. 아무튼 김정남 피살, VX사용, 트럼프의 반감 등은 서로 연결돼 있고 그 중심에는 북한의 테러행위가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미북 접촉 무산은 결국 북한정권의 만행의 소산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박살 난 미북 접촉은 되살릴 수 없을까?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실시되는 3월 중 북한이 먼저 화해의 손짓을 할 것이란 전망은 희박합니다. 미국은 아직 외교 진용이 완전히 갖춰지지 않아 대북정책 기조를 다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북한의 납득할 만한 사과나 진정성 있는 제안이 아니고서는 선뜻 유화 책을 내밀기도 어렵다는 데 공감이 형성돼 있습니다. 국제사회로부터 ‘이단아’ 취급 받는 김정은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가 가능하겠냐는 겁니다.

아울러 이번 사건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진용 인선과정에서 강경파가 더 득세할 수 있으며 그럴 경우 미북 대화 여지는 더욱 좁아질 거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북한에게 ‘뺨 맞은’ 미국이 중국을 압박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수도 있지만, 그 성과는 미지수입니다. 이런 와중에 함경북도 풍계리 핵 실험장에서는 핵 관련 활동이 지속적으로 포착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남북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미북 관계에도 악재 연속입니다.

김정남 암살의 1차적 피해자는 당사자와 유족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미북 대화를 학수고대하던 남북한 주민을 비롯해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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