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초대석] 워싱턴 인근으로 거처 옮긴 탈북자 조진혜 씨

불과 2년전만 해도 중국에서 공안의 단속과 강제 북송의 불안속에 살았던 탈북자 조진혜 씨. 지금은 북조선에서 ‘원쑤’의 나라로 배우고 여겼던 미국, 그것도 수도인 워싱턴 근처에 정착해 열심히 삶의 터전을 가꾸고 있습니다. 스물세살인 조진혜 씨는 어머니 한송화 씨와 열 여덟살 난 여동생 은혜 양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09.09.29
지난주 워싱턴 인근의 한인 밀집지역 애난데일 (ANNANDALE)에서 열린 춤과 노래와 음식이 어우러진 가을축제 코러스 페스티벌 (KORUS FESTIVAL)에서 평양식 순대를 소개한 조진혜 씨를 만나봤습니다.

문: 조진혜씨는 북한에서 10년, 중국에서 10년 살았고, 중국 체류 중 4번이나 강제 북송 됐죠? 2008년 중국 베이징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통해 난민지위받고 3월 말, 미국 서부 워싱턴 주 시애틀 시에 정착했고, 5월에는 워싱턴 북한자유주간 행사에 참여한 뒤 7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면담, 그리고 8월 초에는 워싱턴에 있는 중국 대사관 앞에서 14일 간 탈북자 강제북송 반대 단식 농성하다 탈진해 병원에 입원했구요. 그러니까 미국에 도착한 뒤 채 5개월도 안돼 정착에 매진하기 보단 오히려 탈북자 인권을 위한 일에 진력하셨는데. 왜 그랬습니까?

조진혜: 제가 떠나올 때 남아있는 탈북자 몇분이 계셨어요. 그분들을 남겨놓고 나만 떠나와서 그분들이 함께 오지 못한 안타까움 그리고 내가 먼저 온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문: 원래 시애틀에 계셨었는데 워싱턴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조: 7월 7일에 이사왔습니다. [그럼 두달 좀 지난거네요]. 네.

문: 이쪽으로 이사온 배경은?

조: 여기에서 공부하는 일도 그렇고 정치적으로나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도 그렇고 언론사들도 여기에 다 모여있고 해서요. 이쪽에 오면 앞으로 탈북자들을 돕기위해 [미국]정부에 호소하는데 더 이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또 지역도 크니까 정착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사왔습니다.

문: 지금 공부하고 계세요?

조: 네. 영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영어가 원만히 되면 GED따려고 합니다.

문: GED가 뭔지 설명해주시죠.

조: 한국으로 말하면 고등학교 검정고시 같은 겁니다. 고등학교 자격증이 있어야 대학도 갈 수 있으니까요. 저희는 이때까지 10년동안 떠돌아 다녔기 때문에 교육을 정규적으로 받지 못했어요. 성경으로 하나님 말씀 배운거 외에는 공부를 정규적으로 못했지요. 세상 살아가려면 지식을 제대로 익혀야 한다는 어머님 바람이 있어서요. 하여튼 자유를 찾았고 노력만 하면 배울 수 있으니까 지금 공부를 하려고 노력중입니다.

문: 지금 미국말 영어가 어느 정도 됩니까?

조:
알아듣는 건 조금 되는데 말하는 건 자유롭게 안 됩니다. 아직 겁이나기도 하고 거부감도 있는데, 동생은 아주 잘합니다.

문: 동생이 몇 살이죠?

조: 지금 열여덟살인데 하이스쿨 다니고 있어요.

문:
그러니까 고등학교죠?

조:
네, 지금 학교에서는 그 많은 미국학생 다 제치고 일등하고 있어요. 시험만 치면 계속 A를 받아 옵니다.

문: 북한에선 A를 뭐라고 합니까?

조: 북한에선 10점 만점이라고하니까 10점생, 우등생이란 얘기입니다.

문: 미국에 도착한 지 1년 반밖에 안됐는데 동생이 어떻게 영어도 잘하고 수학 역사 과학 다 잘합니까?

조: 지금 제일 바빠하는게 [힘들어 하는게]지리를 바빠하고 그 나머지는 거의 백점을 받아요. 체육같은 거 조금 달리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다 잘하고 있습니다.

문:
공부를 방과후 집에서 그냥 하는데 그렇게 잘 합니까?

조:
아닙니다. 집에서 밤 두시 세시까지 하고요, 모르는 것은 인터넷 뒤지고 이웃 찾아가면서 하구요. 코 피 계속 터지면서 하고 있어요. 너무나 하고 싶었던 공부니까요. 또 동생이 생각해도 어머니는 연세 드셔서 영어를 못하실 거고, 언니도 나이가 있고또 인권 활동한다고 공부를 못하고 다니니까요. 또 가족에 절실하게 필요한 서류를 영어로 해야하니까 영어의 필요성을 많이 느꼈고요. 그리고 언제까지 남의 도움만 받을 수는 없고 우리 힘으로 해야한다는 생각에서 동생이 영어를 피눈물나게 배웠어요. 그래서 이제는모든 서류를 그 애가 다 알아서 하고 내가 어디 갈 경우 비행기표 사는 것도 동생이 해줍니다.

문:
조진혜 씨는 운전 합니까?

조: 네, 운전은 미국 와서 몇 달 만에 했습니다.

문: 운전면허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땄습니까?

조: 시애틀에서는 한국말로 운전면허 시험을 볼수 있었어요. 그래서 한국말로 준비해 한 번에 붙었어요. 면허따서 한 동안 중고차 마련해 잘 타고 다녔는데 이쪽으로 이사올 때 가져오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냥 포기하고 왔습니다. 여기선 아직 차가 없어서 좀 힘들죠.

문: 지금 살고 계신데가 워싱톤 수도에서 가깝죠?

조: 네, 메릴랜드입니다. 메릴랜드 하나교회에 있습니다.

문: 교회에서 거주하는 것은 누가 제공했나요?

조: 교회에서 다른건 못 도와줘도 집 하나는 도와주겠다해서 교회 뒤에 있는 선교관을 하나 받았습니다.

문: 그럼 그 집에서 어머니와 동생 은혜 씨와 셋이 살고 있는데 우선 정착단계에서 중요한 게 먹고 사는 일일텐데요. 그동안 어떻게 살았습니까?

조:
처음 시애틀에 와서는 첫 달부터 집세를 우리돈으로 내고 살았습니다. 석달이 지나서는 일자리를 찾았구요. 한국 마트에서 캐쉬어도 하고. [마트가 무슨 뜻인가요?] 한국말로 하면 상점이죠. 상점 판매원 하고, 식당에서 웨츄리스도 하고. [웨츄리스를 북한식으로 말하면?] 북한식으로는 접대원, 봉사원이라고 합니다.

문: 벌이는 괜찮습니까?

조: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지금 불경기라서. 팁이 얼마 안되니까 돈은 별로 안되고. 그리고 여기 워싱턴에 와서는 아직 일자리를 못 잡았습니다. 일자리가 있어도 먼 곳이어서 차가 필요한데 차가 없어서 하기가 어렵구요. 좀 어렵습니다.

문: 그러니까 워싱턴에서는 정착을 위한 시작단계군요.

조: 네.

문:
시애틀과 워싱톤의 한인사회, 그리고 미국인 주류사회를 보면서 북한과 중국에서 살던 거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까?

조:
너무 자유스럽고 맘 편하게 사는 것 같아요. 주위에 신경쓰지 않고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한테 미안하지 않게 자기 양심껏 살고 있고 이것이 정말 사람 사는 곳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곳에 많은 탈북자들이 왔다면 오늘 같은 날 순대 장사를 같이 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문:
작년에 우리방송과 회견할 때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이 자기들을 구출해 줬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아직도 그런 요청 받으세요?

조: 그렇죠. 지금도 오고 있어요. 이미 온 탈북자를 통해 아는 사람과 아는 사람을 거쳐 요청이 오는데요, 지금은 탈북자를 도와주는 단체들이 후원금이 부족해 많이 못 데려오는 상황이고 또 지금 북한에는 식량난이 다시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농촌쪽에서는 사람들이 또 굶어죽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량의 탈북자가 생겨나고 있는데 중국쪽에서 이들을 받아주는 선교사들이 이전보다는 줄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문: 지금 식사는 한식, 조선식, 중국식, 미국식 중 어떤 식으로 합니까?

조: 짬뽕인데요, 네가지 다 먹게돼요. 동생이 아침에 학교에 가야하니까 빵에 우유를 간단히 먹고요, 점심때는 어머니가 시간이 있으니까 북한식과 한국식으로 해주시고, 저녁때는 내가 음식을 만드니까 거의 중국식으로 합니다. 저는 거의 10년을 중국에서 살았으니까 음식을 중국식으로 만듭니다.

문: 영주권은 받았습니까?

조: 영주권은 지문까지 다 찍었으니까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문:
언제쯤 나온답니까?

조:
한, 두달 걸린다고 했는데 아직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문: 중국말도 잘 하시고, 조선말은 물론이고, 그리고 여기서 영어를 배우면 세가지 말을 하면서 번역사를 해보고싶다는 말씀 하셨었는데 아직 그런 꿈이 있습니까?

조: 네. 중국에 있을 때는 한국 무역회사의 중국어 통역을 해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 그런 분야에 꿈을 가지고 있고, 특히 유엔 같은 곳에서 탈북자를 돕는데 필요한 번역일을 하면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문: 그리고 신학 공부도 해보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던데, 기독교 선교나 목회를 한다는 것이죠?

조: 저희 가족은 어떻게 보면 선교사님들의 열매입니다. 중국에서 10년간 살아오면서 선교사님들의 도움을 받았고 또 한국사회의 후원금으로 먹고 입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걸 감사하고 그에 보답하는 길은 내가 신학을 공부해 하나님을 더 잘 알아서 내 나라 사람인 탈북자들을 전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낯설고 물설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미국에 와서 여러가지 어려움도 있고 보람도 있을 텐데, 지금 중국 내 탈북자들이나 북조선에서 나와 한국이나 미국으로 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실제 경험한 분으로서 이들에게 어떤 충고나 조언을 해주고 싶습니까?

조:
네번 다섯번 잡혀도 좌절하지 마시고 또 감옥에서 ‘힘들다, 이게 마지막이다’ 라고 생각해 자살하거나 좌절하지 마시라고 꼭 부탁드리고 싶어요. 저도 네번을 북송 당해 죽을 고비 넘기고 총살 당할 뻔한 일도 있었지만 지금 살아서 미국땅에서 한인축제라는 큰 축제에서 순대장사도 하면서 이렇게 마음껏 웃으며 사니까 꼭 희망 가지시고 여기까지 오시면 좋겠어요.

MC: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작년 3월 미국에 도착한 뒤 지금은 수도 워싱톤 지역에서 두 달째 정착의 삶을 가꾸고 있는 탈북자 조진혜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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