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만사일생’ 펴낸 홍순경 위원장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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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에 수록된 사진. 2013년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으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임명장 받는 홍순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회고록에 수록된 사진. 2013년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으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임명장 받는 홍순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사진-바른기록출판사 제공

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파키스탄과 태국의 북한대사관에서 13년간 외교관으로 일하다 가족과 함께 탈출해 2000년 한국에 들어간 홍순경 씨가 대사관 탈출 15년만에 회고록을 펴냈습니다. ‘북한대사관 참사의 자유를 향한 탈출- 만사일생’이란 제목의 이 회고록에서 홍순경씨는 북조선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배경과 북한 대사관 외교관들의 어려운 생활, 그리고 한국 정착 이후 북한민주화를 위한 활동과 한반도 통일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홍순경씨는 1997년 한국에 망명한 주체사상의 대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뒤를 이어 탈북자 단체인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작년(2003)에는 박근혜 대통령 직속 자문위원회인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돼 통일시대에 대비한 국정자문을 하고 있습니다.

전수일: 1999년 2월 16일 김정일의 생일 행사 치르고 난 다음날 2월 17일, 홍 위원장님은 운명의 날로 기억하실 겁니다. 북한 당국으로부터 ‘작은 아들과 함께 귀국’하라는 소환령을 받고 이틀 뒤 19일 아내와 아들과 함께 가족 모두가 대사관을 탈출했습니다. 
왜 북한 소환령에 응하지 않으셨습니까?
홍순경 위원장: 책에서 서술한 것처럼 나의 긴급소환은 정상소환이 아니었습니다. 내 소환장이 오기 전에 우리 상급인 이종환 안전기술국장이 체포돼 감옥을 갔습니다. 베이징 주재 지문회사 직원과 기술자들도 모두 소환돼 감옥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태국에 있는 우리에게는 연락이 없다가 몇 달 뒤인 2월 17일 긴급전보가 온 것이죠. 그 전보는 정상적 소환령이 아닌 체포장과 같은 엄포의 소환장이었습니다.  태국에 8년 이상 근무한 나에게 당장 하루 건너 다음 날 특별비행기로 저의 아들과 기술자 6명 중 4명과 함께 들어오라는 것이었는데 그건 정상 소환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들어가면 체포되고 가족은 망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아들 둘 중에 하나는 살려야겠다는 마음에 탈출을 결심한 것입니다.

전: 큰 아들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 북한에 있었고 작은 아들만 위원장님과 함께 태국에 있었던 것이죠?

홍: 그렇습니다. 큰 아들은 사실상 북한에 남은 인질과 같았습니다. 자녀 여러 명이 있는 경우에도 외부에 데리고 갈 수 있는 자식은 1명으로 규정돼 있었고 그 연령도 제한이 돼 있었습니다. 여하튼 외교관의 가족 일부는 사실상 인질로 본국에 남아야 했습니다.

‘만사일생’ 책 표지. 사진-바른기록출판사 제공
‘만사일생’ 책 표지. 사진-바른기록출판사 제공 Photo: RFA

전: 그래서 홍 위원장님의 가족 탈출사건은 이 책의 제목 “북한대사관 참사의 자유를 향한 탈출”처럼 전 세계적으로 보도되고 큰 화제였죠. 일단 대사관을 탈출해 보름 정도 민가에 숨어 지내다 북한대사관 보위부 요원들의 습격으로 체포돼 며칠 대사관에 억류됐었죠. 그 뒤 홍 위원장님과 부인은 한 차에, 또 작은 아들은 다른 차에 태워져 라오스 쪽으로 수송되다 홍 위원장님 부부가 탄 차량이 전복되는 바람에 라오스 국경까지 가지 못하고 9사1생으로 태국 경찰에 구조를 받았지요. 하지만 아들은 북한 대사관에 억류됐습니다. 근데 당시 북한대사관 주장에 따르면 ‘참사 홍순경은 태국으로부터 쌀 31만톤을 북한으로 수입하면서 쌀 거래대금 8천만 달러를 횡령’했고 또 ‘태국에서 마약을 구입해 러시아에 팔아 넘긴 범죄자’ 라고 태국 신문에 보도됐습니다. 그에 대해 홍 위원장님은 태국 정부의 보호 아래 그를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습니까? 저희 청취자를 위해 당시 반박 내용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해 주시죠?

홍: 사실, 북한은 어떠한 탈북자도 체포하기 위해서는 그를 범죄자로 만들어 왔습니다. 거짓말 범죄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내 경우 북한이 언급한 쌀 31만톤 거래는 보통 신용장도 아니고 현금 거래도 아니고 2년 후불로 지불하는 조건으로 쌀을 수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내가 돈을 떼먹었다면 현금 거래였어야지요. 실제 현금은 오가지 않았습니다. 또 현금 8천만 달러라면 엄청 거대한 돈인데 출장을 가서 주머니에 넣을 돈이 아니지않습니까? 그래서 나는 기자회견에서 북측의 말이 사실이라면 8천만 달러를 내게 전달한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받았다면 영수증이 있을 터이니 그 영수증 내놔 보라고 했습니다. 만일 은행에서 내가 그 돈을 받았다면 내가 인출한 근거를 대라고 했죠. 그리고 북한이 전혀 근거도 없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태국에 쌀 대금을 물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 큰 대금을 홍순경이 횡령했으니 태국 당신들 나라에 줄 돈이 없어 못 주겠다’고 발뺌하려는 모략이라고 설명했죠. 회견에 나온 기자들은 내 설명을 금방 이해했습니다. 1억에 가까운 달러를 개인이 마음대로 떼어 먹고 버젓이 태국 대사관에서 계속 근무하고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 마약 건 주장에 대해서 나는 ‘만일 내가 태국에서 거래했다면 마약을 판 사람 나와봐라, 그리고 내가 러시아에 가서 넘겼다면 내 여권을 확인해 봐라, 내 여권에는 러시아 들어간 흔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실제 태국에 근무 중에 러시아에 간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니까 태국정부는 북한을 믿지도 않고 증오한 것이죠.

전: 그 회고록 읽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비상식적이고 금세 들어날 일을 그런 식으로 거짓말 할 수 있을까. 북한도 한 국가인데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고 발표를 했겠나’ 하는 어이없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홍: 북한에서는 범죄자로 규정하는데 재판을 통해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하지 않습니다. 그 보다는 개인에 대해 강압적으로 자백을 받으면 그게 증거가 됩니다. 조사기관에서 피의자가 했다는 답변이 나올 때까지 고문하는 등의 강압적 방법을 동원해 범죄혐의를 씌우게 됩니다.  북한은 그런 식으로 앞 뒤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단 범죄를 뒤집어 씌우는데 그게 북한 내부에서는 먹힙니다. 당시 북한 당국은 그런 식이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통할 줄 알았던 것이죠. 내 경우 말고도 다른 탈북자들의 수기를 읽어 보면 북한 당국이 터무니 없는 범죄를 씌워 소환시키려 한 경우가 대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 당시 홍 위원장 가족 납치 사건에 대해 태국 정부가 매우 단호했다고 쓰셨습니다.  ‘북한의 불법 납치행각 범죄 행위에 대해 단호히 추궁하고 비판했다. 그건 곧 태국의 주권을 침해한 행위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고 이런 자세로 태국정부는 북한정부에 최후통첩식의 압력을 넣어 결국 북한 대사관에 억류돼 있던 작은 아들도 돌려 받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셨죠. 그런데 대사관을 탈출한 뒤에 과거 북한대사관의 불법 체포 행각을 회상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1991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3호청사-대남적화 공작 전문기관-에서 파견된 부부가 있었는데 당국의 소환령을 받아 남편은 소환됐지만 부인은 남편의 연락을 받아 탈출했다. 당시 태국 대사관의 지시로 대사관 직원들이 ‘칼과 몽둥이를 지참한 후, 그 여자가 갈 수 있을 만한 곳- 한국 대사관과 공항 주변-을 잠복 감시했었던 기억이 난다’고 쓰셨습니다.
아마 자유세계에서 읽는 독자는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이런 외교관의 ‘불법 만행’을 어떻게 정부 자체가 지시를 할 수 있냐고 의아해 할 겁니다. 해당 국가에는 법과 질서가 있는데 외교관에게 칼과 몽둥이를 쥐어주고 가서 잡아오라고 할 수 있습니까?

홍: 그게 바로 김정일 독재정권의 행태였습니다. 그런 사례는 한 가지뿐이 아닙니다. 평양에서 탈출한 자가 태국에 갔으니 잡아서 소환시키라는 지시는 여러 번 받아 봤습니다. 체포조를 짜서 조별로 지역별로 행동하게 하는데 권총은 없으니까 칼 같은 걸 숨겨 가지고 가서 비상시에 칼로 시해해서라도 체포해 오라고 지시하는 겁니다. 91년도 사건 역시 그 아주머니가 탈출했을 때에도 대사관이 비상회의를 열고 직원 각자가 분담해 한국대사관 주변과 공항 주변에 가서 감시했었지요.  자유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북한에서는 응당한 조치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전: 그 뒤에 1년 반 가량 방콕 난민수용소에 머물다가 2000년 10월 한국에 입국하셨습니다.  난민수용소에 있을 때 한국 대사관 사람들이 자주 면회를 와서 한국행을 권고했지만, 홍 위원장 가족은 미국, 호주, 캐나다 세 나라를 망명 최우선 대상국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홍: 북한에서 제일 적대시 하는 나라는 한국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국에 갈 경우 북한에 남은 가족, 친척들에 대한 박해가 더 심하다는 것이죠. 큰 아들 가족이 불쌍해 조금이라도 박해를 덜 받게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로 가려 했습니다. 또 당시에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한 게 있습니다. 당시 숱한 탈북자들이 있었지만 중국 내 한국 공관에서는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으며 나는 비록 북한 대사관에서 일했던 사람이지만  ‘한국 대사관 사람들이 잘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사람의 직급을 가려 일부는 받고 일부는 안 받는 차별대우를 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희가 북한에 살 때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교포가 많이 드나들었음을 압니다. 그래서 만약 그 세 나라 중 한 국가의 영주권을 가지면 나중에 북한에 드나들 수도 있고 또 북한을 변화시키는 운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이들 3국행을 생각했습니다.

전: 그렇군요. 근데 난민 수용소를 떠나기 전에 1997년에 한국에 망명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친필 서신을 홍 위원장께 보내왔다고 하셨습니다. 그 서한에서 황 전 비서는 ‘한국으로 건너와 나와 함께 도탄에 빠진 북한 인민들을 구해내기 위한 통일운동을 함께 하자’고 홍 위원장께 권고했다고 하셨는데요, 그 편지도 홍 위원장 가족이 한국행을 결정하는 데 한 요인이 됐다고 하셨죠?

홍: 그렇습니다.  사실 당시 갈 곳을 놓고 가족이 많이 고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태국 내 미국대사관에서는 처음에 우리를 받아주겠다고 해서 기다렸습니다. 미국 대사관에서 국무부에 저희 망명신청서를 보냈는데 그때가 2000년도였습니다. 북미관계나 남북관계도 좋은 때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정부는 북한의 비위를 거슬릴까봐 한 달 만에 제 망명 신청에 대해 거부 통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러자 유엔난민국은 다시 노르웨이에 저희의 망명신청을 보냈습니다. 노르웨이에서는 보름만에 승인을 보내왔습니다. 저희를 받겠다고요. 하지만 우리 가족은 토의를 한 결과 노르웨이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노르웨이는 너무 먼 나라이고 거기에 교포도 별로 없으니 우리 가족이 고독할 것이라는 결론이었습니다. 또 그 당시 황장엽 선생 편지도 왔고 해서 아무래도 우리는 한국으로 가는 게 옳겠다고 결정하게 됐지요.

전: 책의 적지 않은 부분을 북한 외교관 생활에 대해 쓰셨더군요.  북한 외교관의 월급은 한국 외교관의 25분의 1, 그러니까 4% 수준이란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북한 외교관은 허리띠를 졸라 매고, 대사관에서 합숙하면서 소요 비용을 최소한 줄이고, 그 비용도 밀수 유통이나 운반 수수료 등으로 돈을 벌어 충당한다. 또 벌어들인 외화의 일부는 미리 떼어서 충성 자금으로 보낸다. 유능한 외교관이 되려면 외화벌이에 능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외화 벌이라는 건 결국 외국 정부를 속이거나 탈법, 부정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으로 다른 나라 땅에서 도둑질을 하며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고 부연하셨는데요.

홍: 그건 다 사실입니다. 원래 북한이 외화부족으로 대사관 비용을 내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무역활동하는 대표부 사람들은 1980년대 초부터 자체적으로 벌어 사용하는 건 물론이고 추가로 충성자금을 바치라는 지시가 내렸습니다. 그러니 외교관 직분을 불법 활용해 외화를 벌어 대사관 운영을 유지해야 하고 또 각자 생활 유지를 하면서 북한 지도부에 충성자금까지 만들어 바쳐야 하는 것이 북한 외교관의 실상입니다.

전: 그 실례로 홍 위원장님이 태국 대사관 참사로 있을 때 직접 네팔주재 북한 대사관에 출장
한 번 다녀오면서 금괴와 달러 불법 운반 밀수를 도와주는 것으로 6천달러를 번 적이 있다고 쓰셨고 또 회교국가로 음주가 엄격하게 금지돼 있는 파키스탄 주재 북한대사관은 술과 맥주를 밀수해 돈벌이를 했다고 쓰셨습니다.

홍: 그렇습니다. 각 주재국마다 북한 대사관에서 외화벌이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그래서 대사관마다 어떻게 하면 외화를 벌 것인지를 연구합니다. 내가 태국에 있을 때는 태국 내부에서 외화벌이 하기가 아주 힘이 들었습니다. 태국은 모든 시장이 활성화 되고 제한하는 것이 없어서 불법을 해서 돈벌이를 할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태국주재 북한대사관에서는 네팔대사관과 연결해 금괴와 달러 운반 돈벌이를 했습니다. 네팔대사관에서 주문이 너무 많아 자신들이 하기 어려울 때에 태국대사관에 일거리를 주는 식이었습니다. 태국주재 대사관에서는 나만 한 게 아니라 대사관 당비서도 했고 여러 사람들이 했습니다. 대사도 했습니다. 대사 월급이 380달러인데 그걸로 무얼 하겠습니까? 그래서 저희 외교관들은 불법거래를 해서 일부는 대사관에 바쳤고 또 대부분은 개인들이 쓰도록 눈감아 줬습니다. 파키스탄은 술과 맥주를 공식적으로 상거래 할 수 없는 회교 나라입니다. 공항에서도 철저히 검사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술 한두 병 가지고 들어가기도 힘들죠. 허나 외교관들은 술과 맥주를 정기적으로 신청하면 공급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특권을 활용해 무관세로 술을 들여다 내부 밀수꾼에게 전달합니다. 거기에 넘겨주면 적어도 3백불 이상의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걸로 대사관 유지도 하고 충성자금 바치고 또 모든 생활을 했습니다.

전: 그런데 그런 밀수 외에도 수령의 만년장수를 위해 외교관들이 현지의 희귀한 식료품, 약재 등을 확보해 평양에 보냈다고 하셨는데요, 바다 거북이 알, 낙타 발통, 슈퍼 식용 개구리 등, 진시황제라고 해서 이런 걸 먹어 봤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홍: 북한은 수령절대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수령만 만년장수하면 모든 게 풀린다는 것이 북한의 교육이고 북한 인민의 생각입니다. 수령의 만년장수와 건강을 위해 세계에서 좋다는 약재와 식료품은 최우선으로 확보하게 되는데 그게 충성심의 표현이 되는 겁니다. 우리를 외국에 나갈 수 있게 해준 수령의 은혜와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 수령 장수에 필요한 것을 구해서 보내는 걸 가장 명예로운 과업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당시 슈퍼 개구리는 우리가 직접 한 게 아니라 호위국 대표단이 나와 수입해 갔습니다. 낙타발통은 내가 직접 한 것은 아니었고, 내가 파키스탄을 떠난 뒤 제2경제 대표로 있던 강태은이란 사람이 낙타발통을 사서 북한에 보냈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하튼 수령 장수식품과 관련해서는 각 대표부나 해외에 나가있는 모든 사람이 머리를 쓰고 해야하는 과업으로 되어있습니다.

전: 아무리 북한정권이 외화가 부족하다해도 세계 각국 주재 대사관에서 보내오는 충성자금이 적지 않을텐데 북한 총리를 지낸 ‘이종옥 부주석’이 태국에 출장 왔을 때의 일화를 읽고는 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부주석과 일행의 저녁 밥값이 없어서 홍 위원장 자택으로 초청해 닭곰탕을 만들어 대접했다죠?

홍: 사실입니다. 이종옥 부주석 왔을 때 만나보지도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대사가 하는 말이 부주석 일행이 외화 부족으로 아침식사는 호텔제공으로 할 수 있었지만 점심식사를 하게되면 저녁 식비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참사급 직원과 대사 당비서 등 집집마다 저녁식사를 조직하는데 나에게도 한 끼 대접하라고 해서 했습니다. 그게 북한의 실상입니다. 실제 김정일과 함께 활동하는 강석주라든가 외교활동과 관련해 파티에 참가해야 하는 사람들은 외화를 김정일이 직접 주면서 많이 배려하는 것같았습니다. 그러나 국가 부주석은 명예직이고 아무런 실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은 외화를 만져보지 못합니다. 정부가 규정한 출장비가 있긴 하지만 그걸로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규정된 출장비에 따르면 대사관에서 유숙할 때에 하루 잡비가 0.5달러입니다. 호텔에 숙박할 시는 그 잡비가 하루에 1달러입니다. 그걸로 무얼 하겠습니까? 빈 털터리인 것이죠. 사실 이분들이 북한의 높은 간부라 해도 외화 한 푼 제대로 쓸 수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죠.

전: 1997년 고난의 행군이 한창일 때 굶주림으로 아사자 많이 나올 때인데, 당시에 평양에 출장을 나갔다고 하셨죠. 당시 처제네와 여동생 집을 들렀다 왔다고 하셨는데요, 여동생이 이웃집 할아버지가 식량 축내는 입을 하나라도 덜겠다며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했다죠? 근데 그 할아버지가 유언장에 ‘나는 병이 있어 먼저 가니, 장군님 잘 받들고 살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는데 그건 아이들에게 피해 갈 것이 두려워서였다면요?

홍: 그렇습니다. 북한에서는 자살행위는 반역죄로 낙인찍힙니다. 국가를 반대해 죽었다는 것이죠. 자살은 반역죄니까 자살한 자의 자식은 반역자의 자식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식들 미래가 막연하게 됩니다. 그래서 죽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반역자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그런 유언장을 남기는 게 북한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자신이 죽더라도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심정은 모든 부모가 같지 않습니까? 배가 고프고 세상 살 맛 안 나서 죽었다고 하면 반역자가 되니까 가족을 위해 죽으면서까지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거짓말로 유언을 쓰고 갈 수밖에 없는 곳이 북한사회입니다.

전: 책 마지막 부분에는 밝은 얘기를 많이 쓰셨더군요. 결국 탈출하게 된 큰 동기 중의 하나가 아들 하나는 살려야겠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작은 아들을 살려 한국에 입국해 지금 그 아들은 명문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큰 회계법인에 취직했다고 쓰셨죠. 지금은 남한 여성과 결혼애 아이 둘을 낳아 잘 살고 있다고 하죠?

홍: 네. 그렇습니다.

전: 또 책 후반부에는 북한의 주체사상 -내 운명의 주인은 나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 는 명제는 옳지만 북한의 김 부자는 이를 수령세습독재체제 수립에 악용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남한은 비록 이 명제는 없더라도 실제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인 사회이다. 오히려 북에서는 내 운명을 내가 개척할 수 없다. 북의 주체사상은 구호일 뿐이다.” 라고 적으셨는데요, 어떤 의미입니까?

홍: 북한에서는 그 명제를 누구나 외우고 있습니다.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고 운명 개척의 주체도 자기 자신이다’ 라고요. 허나 그 명제대로라면 자기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살아야 맞는 것일텐데 내가 실제 탈출해 보니 내 마음대로 어디에 가서 살 수 있는 권한이 없는 사람이더군요. 범죄자로 씌워져 체포 당할까봐 쫓기는 신세에 분통이 터졌습니다.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인데 왜 내 마음대로 내가 살고싶은 대로 가서 살지 못하게 하나 하는 반발심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북한의 교육과 실제 현실은 완전히 다릅니다. 황장엽 선생도 ‘국민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고 그들의 주체에 따라 모든 게 결정되어야 하지만 실제는 수령 한 사람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현실은 나의 주체사상 이론이 북한의 독재정권의 강화에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그것이 가슴아파 탈출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 와서야 진실한 주체 철학 인간중심 철학을 전개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다시 말해 북한에서 교육과 실제 집행은 천양지차입니다. 북한의 헌법은 언론 집회 결사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자유가 있기는커녕 정반대입니다. 모든 법과 인권이 무시 당하고 오직 김씨 일가 멋대로 모든 백성을 노예화한 사회가 북한입니다.

전: 홍 위원장께서는 작년, 2013년 7월, 박근혜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돼 박 대통령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으셨습니다. 박 대통령은 올 들어 ‘통일은 대박’ 이라는 화두를 던졌는데, 홍 위원장께서는 대박의 길로 가려면 ‘정치 주도형’ 통일 보다는 ‘경제 주도형’ 통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책에서 언급했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홍: 제가 대한민국에 와서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된 것은 제가 잘 났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한국의 탈북자 전체에 대한 정부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2만7천명 탈북민 중에서 한 사람을 발탁했다는 것은 탈북민이 대한민국에 귀중한 존재라는 뜻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책에서 통일이 정치주도형을 되기 보다는 경제적 통일이 선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 건 과거 독일처럼 정치통일을 갑자기 하면 한국의 정치적 부담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 예를 들어, 만일 남북을 정치통일하면 헌법을 하나로 통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최저임금은 시간당 5, 6달러 정도이고 하루에 8시간 일하면 40-50달러가 됩니다. 그런데 현재 북한의 한 달 평균 월급은 채 1달러도 안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통일을 하게되면 북한사람들의 임금도 갑자기 올려야 하는데 그럴 경우 낙후된 북한의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상당한 지장이 있을 것이고 남한사회에도 커다란 부담이 될 겁니다. 그래서 경제통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뜻은 북한이 시장경제와 개혁개방에 먼저 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북한에 시장경제와 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되면 남한 기업들이 북한을 자유롭게 지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냥 지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한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해 북의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하면 남한 기업도 이익을 보고 북한은 북한대로   기업 발전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도로 항만 등 사회기간 시설을 건설 구축하자면 값비싼 노동력으로는 빨리 추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북한 노동력의 저임금을 일정 기간 유지하면서 임금 수준을 점차적으로 올려야 북한 사회의 경제 발전이 신속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한꺼번에 한국과 같은 높은 임금 수준으로 경제정책을 실시하면 그 부작용이 너무 클 겁니다. 그래서 저는 북한이 먼저 개혁개방을 해 경제수준을 남한의 60-80퍼센트까지 올리는 경제통일 이후에 정치적 통일을 하는 게 순서라고 보는 겁니다.

전: 전 세계에 나가있는 북한 외교관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홍: 저도 북한 대사관 생활을 오래해 봤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자본주의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한국에 대해서도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막상 한국에 와 보니 세계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살기 좋은 나라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또 한국에 온 탈북자들이 북에 있는 자기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고 있습니다. 물론 탈북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잘 살아서가 아닙니다. 여기서 이밥에 고깃국에 좋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돈을 절약해 북한 가족에게 부칠 수 있는 겁니다. 가족에게 송금하는 그 자체가 대한민국이 살기 좋은 나라임을 보여주는 산 증거입니다. 북한 대사의 월급이 380달러였고 아직도 그 수준일텐데 여기 탈북자들은 일이 없어 보조금만 받아도 월 600-700달러입니다. 하루 빨리 북한 백성도 세계 어느나라 백성 못지않게 살 수 있게끔 북한이 빨리 변화되면 좋겠습니다. 외교관 여러분이 이런 변화를 촉진해 주면 좋겠습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태국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무역참사로 일하다 가족과 함께 탈출한 지 15년만에 자신의 회고록을 펴낸 홍순경 씨와의 대담을 보내드렸습니다. 홍순경 씨는 현재 한국에서 탈북자 단체 ‘북한민주화위원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저는 전수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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